북경114
북경맛집
공항픽업
렌트카
가이드
회원가입
로그인
모바일버전
CCTV다큐동영상

[자금성] [다큐]고궁(09)-궁정 서양풍

페이지 정보

작성자 셀프차이나 작성일14-05-12 15:50 조회543회 댓글0건

본문

또 새로운 한해의 음력설이 찾아왔다.
자금성은 1년에 한번씩 열리는 신정 조하를 맞이했다.
‘만국내조도’는 바로 건륭 연간 자금성에서 조하하던 장면을 그린 것이다.
태화전 밖에서 문무백관들이 조용히 명을 기다리고 있다.
건륭 황제가 여유 있게 후궁의 처마 밑에 앉아 태화전에서 여러 나라 사신을 접견할 준비를 하고 있다.
전문가의 고증결과 건륭의 지시로 궁정 화가들이 황제의 공적과 은덕을 찬양한 예술창작품인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화면에 그린 러시아 사신이 서양시계를 들고 있는 장면이 진실하다는 점이다.
그때 서양의 선진적인 과학기술을 대표하는 시계가 건륭시기의 자금성에서 가장 유행되는 물건이었다.
이런 것들은 타이머이자 장식품이며 고급 놀이개이자 정교한 예술걸작이기도 했다.
그때 궁정에서는 시계를 적극 모으고 제작하고 수장했다.
세계에서 보기 드문 여러가지 시계가 다양한 경로를 거쳐 황궁으로 집중됐다.
현인들이 그 연대 시계의 정교함과 화려함에 감탄하고 있을 때 4백년전 시계가 서양인이 자금성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던 첫 수단으로 되었다는 점은 아마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이탈리아의 선교사이다.
1601년, 명나라 만력 29년, 그가 자금성을 방문한 첫 서양인으로 되었다.
그해 마테오 리치가 명제국의 도읍인 베이징에 왔다.
그는 유복을 착용하고 머리에는 유관을 썼는데 엄연히 그때 중국 지식인 차림이었다.
이는 마테오 리치가 중국 사대부 계층과의 거리를 가까이하고 전주교의를 전파하려는 책략이었다.
15~16세기, 지리 대발견과 동서방 항로의 개통으로 유럽 천주교가 동방으로 선교활동을 펼치는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16세기 중기부터 유럽 선교사가 육속 중국으로 들어왔다.
그때의 중국은 2천여년이나 유학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아주 성숙된 문명을 소유한 나라였다.
조정으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관념, 심리상태, 행위방식이 거의 모두 유학의 틀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에 대해서는 전 사회적으로 배척했다.
마테오 리치는 선구자로부터 필요한 경험을 받아들였다.
그는 중국 문화의 넓고 심오함을 칭송하는 한편 서방의 시계, 지도 등 선진적인 과학기술상품으로 중국 사대부 계층의 주의를 끌었다.
사실이 증명하다싶이 이런 책략은 그의 사업에 큰 도움이 됐다.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는 그와 학술을 토론했는데 이중에는 중국 과학사에서도 유명한 인물인 서광계도 있었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을 천주교에 귀의하게 하려면 반드시 갖은 방법을 다해 중국의 최고 통치자인 황제를 교도로 되게 한 다음에 황제의 권위를 이용해 백성을 움직여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황제에게 선교하는 꿈을 실현하려면 우선 황제를 만나야 했다.
그때 공물을 진상하는 것은 서양인이 황제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였다.
이번 방문에 앞서 그가 만력 황제에게 진상한 공물에는 총 40여 점이 있었는데 이중에는 자명종, 삽자가상, 성모상, 팔음금 그리고 2개의 유리삼릉경도 있었다.
톈진 세감 마당은 마테오 리치가 공물을 진상할데 관한 주장을 일찍 만력 황제 앞에 전달했다.
주장은 만력 황제의 주의를 불러일으키지 못한 듯 했으나 마테오 리치가 진상한 2개의 자명종은 인차 황제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만력 황제는 즉시 마테오 리치가 입궁하여 시계를 테스트하라고 불렀다.
시간을 알리는 소리를 빨리 듣기 위해서이다.
마테오 리치는 결국 자금성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며 만력 황제와 접촉함에 있어서도 좋은 첫 시작으로 되었다.
‘속문헌통고’는 청나라 대학사 장정옥 등 사람들이 쓴 백과전서이다.
이 책에는 큰 자명종이 오후 1시에 한번, 2시에 두번, 밤 12시에는 열두번, 점심 12시에 또 열두번 울리지만 작은 시계는 15분에 한번씩, 정각이 되면 네번 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눈부신 시계케이스 안에서 힘이 기어장치에 의해 전달되고 움직여지는데 그 과정이 뒷 면에 가려있다.
결과 소리와 시간이 신비롭게도 잘 맞물려 떨어졌다.
만력 황제는 어지를 내려 마테오 리치를 머물하는 것 외에도 그가 수시로 입궁하여 시계를 조정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마테오 리치는 3일을 이용해 환관들에게 자명종의 기계원리를 가르치고 시계를 잘 조정해 놓았다.
이때의 만력 황제는 이미 조정에 나가지 않은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마테오 리치가 황제를 알현하고 선교하는 일이 성사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유일한 수확이라면 어느 한번의 대조회에서 문무백관과 함께 황제의 보좌를 알현한 것 뿐이다.
만력 황제는 마테오 리치가 시계를 진상한 공을 생각하여 그가 베이징 남성에 한 채의 교당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4백년이 지나면서 그 2개의 자명종도 이제는 완전히 없어졌다.
베이징행정학원에 위치한 마테오 리치 묘는 여전히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1610년 5월 3일, 마테오 리치가 베이징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여기에 안장되어 있다.
시계를 진상함으로써 이 서양 선교사는 황궁을 장장 10년이나 드나들수 있었지만 결국에는 황제를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1640년, 자금성의 창고에서 오래 방치된 피아노 한 대를 발견했다.
이것은 40년 전 마테오 리치가 만력 황제에게 진상한 공물이다.
40년 후, 만력 황제의 손자인 숭정 황제가 다시금 이 피아노를 소유하게 됐다.
궁에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숭정 황제는 서양에서 온 음악을 듣고 싶었다.
1623년, 입궁한 독일 선교사 아담 살이 명을 받고 피아노를 수리했다.
그는 은재질의 악기줄을 만들어 피아노를 새롭게 손질했다.
숭정 황제가 음악을 감상함과 아울러 천주교의 교의를 알게 하기 위해 아담 살은 성경 가운데서 10편의 찬미 시를 번역한 다음 직접 작곡 해 황제에게 바쳤다.
그해 11월, 아담 살은 겁없이 상소를 올려 숭정 황제가 천주교에 귀의할 것을 교화시켰다.
이가 바로 황제가 천주교에 귀의할 것을 권고한 독일인 아담 살이다.
1629년, 마테오 리치와 늘 함께 학술문제를 토론하던 청년 서광계가 이제는 명나라의 대과학자로 성장했다.
그는 천주교를 신봉했으며 예부 사랑으로 승진했다.
그 해 6월 21일 일식이 생겼다.
흠천감 관리들이 전통적인 방법으로 잘못 추산했지만 서광계가 서방의 천문학 방법으로 추산한 시간이 실제측량과 완전히 일치했다.
그래서 숭정 황제는 ‘역국(历局)’을 내오고 서광계의 영도아래 서방 선교사가 만든 신력을 사용할 것을 명했다.
이로 서방 선교사가 중국에서 역법을 고치는 첫 시작을 알렸다.
이로부터 서양 천문 역법의 서적이 계통적으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명나라 말기에 130여권에 달하는 ‘숭정역서’를 완성했다.
이 역서가 아직 반포되기도 전에 명나라 정권이 이자성 봉기의 외침소리 속에서 정권이 멸망되었다.
중국 역사에서 천상은 왕조의 흥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인정되었다.
이 점은 왕조가 교체될 때 가장 뚜렷하게 표현된다.
1644년 명나라가 멸망되고 청나라가 건립되었다.
아담 살은 교묘하게 기회를 이용하여 ‘숭정력서’를 ‘의서양신법력서’라 이름을 고치고 새 왕조의 섭정왕인 다이곤에게 바쳤다.
다이곤은 이 역법을 받아들였으며 ‘시헌력’라 이름을 고치고 천하에 발표했다.
이 역법은 줄곧 청나라 말기까지 사용되었다.
이 게첩은 그 해 아담 살이 순치 황제에게 천상을 상주하던 주장이다.
아담 살은 새 집권자를 교묘하게 설득하여 서양 역법을 사용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새 천문의기를 만들어 천상을 추측 계산할 것도 제기했다.
고궁에 수장된 ‘신법 지평식 일귀의’는 아담 살이 순치 원년에 만든 것이다.
사용할 때 지남침을 근거로 남북을 결정하고 그림자 시계바늘이 그림자 위에 투영되는 위치에 따라 시각 및 그 날의 절기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청나라 초기 궁정 초반처에서 만든 녹칠 목질 묘금화 망원경이다.
그 해 아담 살이 베이징에 머물기 위해 섭정왕 다이곤에게 망원경을 선물로 진상했다.
이 천문의기는 청나라 궁정에 수장된 가장 이른 천문의기이다.
선교사 아담 살이 새 정권과의 협력도 순조롭게 이뤄졌다.
다이곤이 죽자 순치 황제가 정권을 잡았다.
그는 비록 불교를 신앙하긴 하지만 아담 살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662년, 24살 난 순치 황제가 천화로 죽었다.
죽기 전에 그는 강희를 황위 계승자로 정했는데 여기서 아담 살의 건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때 정치권력 간의 쟁탈이 아주 치열했다.
강희 황제가 어렸기 때문에 실제로는 배를 위수로 한 협정대신들이 권력을 잡았다.
권력을 에워싼 투쟁이 곳곳에 일어났다.
당시 흠천감 감정을 맡았던 아담 살도 그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었다.
오배의 지지 아래 흠천관 내부에 서양 역법에 불만을 품은 관리들이 아담 살이 나쁜 짓을 꾸미고 있다고 모함했다.
아담 살이 감옥에 갇히게 됐.
하지만 강희 황제의 간섭으로 아담 살이 요행 사형을 모면하긴 했지만 연로한데다 몸이 허약해져 얼마 뒤 억울함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강희가 집정 한 뒤 아담 살이 다시 공평한 판결을 받게 되었으며 마테오 리치 옆에 안장되었다.
시간은 1669년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문, 정오의 햇빛은 눈이 부시면서도 스산하다.
여기서 곧 생사대결이 펼쳐진다.
벨기에 선교사 페르비스트가 이번 대결의 관건적인 인물이다.
전에 그는 아담 살의 조수였다.
대결에 참여하는 다른 한쪽은 오배가 지지하는 흠천감이다.
사건의 발단은 흠천감이 전통적인 방법으로 추산한 역법에 착오가 생긴 것이다.
15살 난 강희는 이번이 오배를 무너뜨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강희는 흠천감 관리와 페르비스트가 함께 오문광장에서 서로 다른 방법으로 정오시간 일영의 길이를 측정하게 했다.
결과 페르비스트의 계산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준확했지만 전통 역법은 측산은 다시금 틀렸다.
페르비스트는 강희가 오배와의 겨룸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도왔다.
그후부터 그는 흠천감의 사무를 전면적으로 책임지기 시작했다.
여기는 베이징 관상대 아래의 영국 유적지이다.
그해 아담 살, 페르비스트 등 사람들이 바로 여기서 천문역법 업무를 처리했다.
페르비스트가 부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6대의 천문 관측의기를 제조했다.
정교한 의기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고관상대에 세워져 있으며 오늘날 베이징의 독특한 풍경선으로 되고 있다.
현재 들리는 이 곡은 그 해 페드리니라는 이탈리아 선교사가 전문적으로 강희 황제를 위해 창작한 소나타이다.
우리는 이 소나타의 유고를 찾았으며 이런 것을 이용해 그 해 강희 황제가 서양 음악을 배우고 감상하던 정경을 복원하려 시도했다.
사서에는 1670년, 강희가 베이징에서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선교사들에게 서양음악을 연주할 것을 명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임시적으로 모은 이 악대는 연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손이 맞지 않아 조화로운 연주를 하지 못했고 연주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결국 강희에게 쫓겨났다.
하지만 이미 강희가 서양 음악에 대한 흥취를 불러일으켰다.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악대가 다시금 강희의 명을 받고 황궁에서 연주하게 됐다.
이번 합주는 4시간이나 지속되었다.
강희가 기분이 좋을 때는 친히 연주에 참여하기도 했다.
황궁에서 직무를 맡은 이탈리아 신부 요셉은 회억록에서 ‘강희 황제가 수학자와 음악가로 되기를 원했다. 비록 이 두가지 분야에 조예가 깊은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아주 좋아했다.’고 적었다.
이 사람이 바로 강희 황제를 위해 소나타를 창작한 페드리니이다.
그의 지도아래 악리 저작인 ‘율여정의’를 편찬했다.
그의 소나타는 중국에 제일 먼저 전파된 유럽 음악이다.
강희 황제는 페드리니의 음악재능을 극찬하면서 수차 그의 연주를 들었고 많은 학생을 그에게 보내 배우도록 했다.
그중에는 황자도 두명 있었다.
강희 황제는 한평생 배움을 갈망했다.
그는 서방 과학에 크나큰 열정을 품고 있었다.
강희가 수리화에 대한 관심은 어린시절 겪었던 ‘역법전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년이 지난 후 그는 신하에게 “짐이 스스로 생각해도 알 수 없거늘, 어찌 사람사이의 시비를 가릴 수 있겠느냐. 그래서 스스로 분발하여 배우고 있다네.”라고 말했다.
그는 그때 유럽나라에서 과학사단을 설립하는 열풍의 영향을 받아 황궁에도 이와 유사한 기구를 내오고 ‘몽양재산학관’이라 명명했는데 목적은 고급 수리인재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1688년, 강희 27년 11월 28일, 조아셍 부베, 제르비용 등 6명 프랑스 과학자가 건청궁에서 강희 황제의 접견을 받았다.
그들은 프랑스에서 가지고 온 30개 과학의기와 서적을 첫 대면 선물로 올렸다.
범상치 않은 선물에 강희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그들이 입궁하여 자신의 과학고문을 맡을 것을 결정했다.
이때부터 외국 과학자가 청나라 황궁에서 과학활동에 수십년이나 종사하는 국면이 시작되었다.
이 지평경위적도공귀의는 시간을 측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태양과 지평 간의 높이를 측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항해에서 많이 사용했다.
측분시적도공귀의는 시간을 측량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분까지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
이것과 뒤에서 전시할 동도금측시규표합벽의는 모두 영국에서 온 것이다.
페르비스트가 강희 8년부터 흠천감의 사무를 맡았을 뿐만 아니라 강희 황제의 수학, 천문, 역학 분야에서의 계몽 스승이기도 했다.
조아셍 부베 등 자들이 입궁한 뒤 강희와 사이좋게 지냈다.
그는 ‘중국황제 강희전’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강희는 큰 열정으로 서방의 과학을 배우고 매일 몇 시간을 들여 우리와 함께 있었으며 낮과 밤에는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자학했다.
이 수동 계산기는 강희 연간에 어제한 것으로 세계의 동일한 유형 기계의 출시보다 그저 몇 십년이 뒤졌을 뿐이다.
이 대수표는 강희 황제가 그 해 수학을 배울 때 사용한 것이다.
강희가 과학기술에 대한 흥취는 그때 과학기술의 발전을 크게 추진했다.
그는 사람을 조직해 일련의 과학기술 업무를 전개했다.
이 은도금 간평지평합벽의는 강희가 천문산학을 배울 때 가까운 거리에서 실제로 측량하는데 전문적으로 사용한 물건으로 청나라 황궁 조반처에서 만든 것이다.
이 반원지평일귀도 강희 연간에 청궁 조반처에서 만든 것이다.
이것은 청나라 때 궁정에서 사용하던 한 세트의 은 제약 도구이다.
강희 황제는 의학에 대해서도 연구가 깊었다.
40세가 되던 해, 강희가 학질에 걸렸다.
그때의 중의 의사들도 속수무책이었는데 선교사가 진상한 금계납상 즉 퀴닌을 복용하고 나서 병이 나았다.
그후부터 그는 서양의학에 흥취를 느끼면서 궁에 실험실을 내오고 약품을 시험제작했으며 친히 관찰하기도 했다.
인체 해부학 지식을 알기 위해 그는 지어 동면하고 있는 곰을 상대로 해부할 것을 명령했으며 강희 본인도 직접 실험에 참가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강희 연간에 지리측량에 사용한 과학의기이다.
조아셍 부베가 ‘중국 황제 강희전’에 ‘어떤 때 강희는 직접 여러가지 의기를 정위하고 조정하여 준확하게 계산했다. 다음 다른 사람을 시켜 거리를 측량하게 했다. 자신의 계산 결과와 다른 사람이 측량한 수치가 서로 일치할 때는 아주 기뻐했다’고 적었다.
이것은 ‘황여전람도’의 광둥 행성부이다.
강희가 친히 선두에 서서 실제감측과 대지 삼각측량 등 선진적인 과학기술을 빌어 완성한 것으로 중국에서 정확한 경위도가 표기되어 있는 첫 전국 지도이다.
이것이 바로 그때 지도를 측량제도할 때 사용한 의기이다.
17세기 말, 18세기 초, 유럽 각 나라의 전국적 측량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거나 막 시작하는 단계였다.
하지만 중국에서 우선적으로 이런 대업을 이룩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규모가 전에없는 것이다.
강희 46년부터 강희 57년에 총집되었는데 중서방 사업일군의 노력으로 강희는 10여년의 시간을 들여 광활한 강토에 대한 도면제작을 완성했다.
아울러 국가가 안정되고 통일되었으며 중국 역사상 새로운 성세를 개척했다.
2005년 오문에서 태양왕 루이 14세-베르사유 진품 특별 전시회가 막을 열었다.
이는 2004년 1월 프랑스 베르사유궁에서 열린 ‘강희대제전’에 대한 화답이다.
그때 그들은 상대와 세계를 알기를 갈망했다.
현재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만나게 되었다.
루이 14가 강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강희를 가장 고귀하고 가장 탁월하고 가장 강대하고 가장 고상한 제왕이라 칭했으며 자신의 이름 앞에는 ‘친절하고 열애하고 진실한 친구’등 글자를 붙였다.
이는 그때 프랑스인 상상속의 강희 황제이다.
그 시기 중서문화 교류가 빈번하고 활발하게 이뤄졌다.
강희는 조반처에 회화, 조각, 시계와 법랑채를 제작하는 작업장을 내오기도 했다.
이 ‘동음사녀도’병풍은 현존하는 가장 이른 중국 유화작품이다.
그때 궁정화가가 서방 선교사로부터 유화기법을 배운 뒤 창작한 것이다.
같은 시기 유럽에는 ‘중국문화열풍’이 몰아쳤다.
프랑스의 볼테르, 독일의 라이프니츠 등 서방의 계몽사상가는 중국의 전통문화로부터 중세기 신학사상과 논쟁할 수 있는 사상무기를 찾았으며 라이프니츠는 역경에서 현대 계산기의 발명원리를 찾아냈다.
전반 18세기, 서방의 여러 주요한 예술은 모두 중국 예술의 강렬하고도 생동한 형상의 영향을 받았다.
그때 유럽의 황족계층들 사이에 장원에 중국식 장식풍격을 인입하는 것이 유행되었다.
그들의 벽에는 중국인의 생활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중서방 문화교류가 건륭시기에 새로운 절정에 이르렀다.
이것은 건륭 연간에 그린 ‘원명원화책’이다.
18세기 초, 원명원을 건설할 때 건륭 황제가 프랑스 선교사 미셀 베노이스트에게 명을 내려 여기에 이런 서양건축을 짓게 했다.
이런 것들은 중서방 원림문화교류에서 교량역할을 했다.
권근재는 자금성 녕수궁화원의 북쪽의 조용한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는데 건륭 황제가 황위에서 퇴임하고 태상황이 되었을 때 사용하기 위해 전문 지은 것이다.
권근재에는 정교한 실내장식을 한 외에 가구도 갖춰져 있다.
통경화와 천정화를 운용하고 서양의 투시화법기술과 중국의 의장화법기술을 교모하게 한데 융합시켰는데 이는 건륭시기 이 궁전에서 서양문화를 수용한 역사적 견증으로 되었다.
이국풍격이 짙은 서양건축은 건륭 황제의 찬사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왕공대신들이 다투어 모방하는 유행이기도 했다.
청나라 사람이 그린 몇 폭의 축수도에서 우리는 길거리에 건설한 서양건축을 쉽게 발견했다.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오면서 서방의 과학, 예술을 가지고 중국 황제를 알현했다.
훗날 선교사의 최초 소원도 점차 중국인에 홀시되었다.
오히려 그들이 가져온 문화가 중국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714년, 광저우에 도착한 무역선박에 7명의 선교사가 탑승했다.
현지 정부는 강희 황제에게 보고를 올렸고 황제는 과학기술 재능이 있는 선교사만이 베이징에 머물 수 있고 나머지는 돌아가라는 명을 내렸다.
남겨진 사람들 가운데 카스틸리오네란 화가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 해 광둥 순무가 카스틸리오네 등 자가 도착했다고 보고한 주장이다.
하지만 그때 이름을 잘못 적었다.
주장에는 강희 황제의 친필 지시도 적혀있다.
얼마 뒤 카스틸리오네가 황제의 명을 받고 베이징에서 강희 황제를 알현했다.
강희는 그의 회화재능을 높이 흔상하여 중국화를 배우는 한편 가끔씩 입궁하여 그림을 그리라는 명을 내렸다.
그후로 그는 50년이나 그렸는데 강희, 옹정, 건륭 세 조대를 거쳤다.
이것은 카스틸리오네가 옹정 황제를 위해 그린 서장상이다.
옹정 이후, 카스틸리오네가 일층 중용되었다.
그는 서방의 유화기교를 끊임없이 조절했으며 주동적으로 중국 황제의 심미요구와 중국 전통의 미학사상에 따라 중국의 종이, 비단, 먹, 붓, 색깔을 이용하여 중서합벽의 새로운 회화창작을 시도했다.
건륭은 카스틸리오네가 초기에 그린 자기와 옹정 황제의 초상화에 ‘그림을 능숙하게 그리는 카스틸리오네가 나의 어린시절을 그렸다네. 불현듯 방에 들어온 자는 대체 누군지 알아 보지 못할것이라네’라고 적었다.
자연히 궁정 서양화가의 창작은 전혀 구애없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카스틸리오네의 그림은 거의 모두 건륭이 주제를 직접 정했다.
이런 회화의 주제는 대부분 건륭 황제가 문치(文治)와 무예 면에서의 공적을 반영한 것이다.
건륭 20년부터 26년 사이, 준가얼부의 반란을 평정한 두 차례의 전역은 나라의 안정을 수호함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일으켰다.
평정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건륭은 궁정의 서양화가더러 대형 역사사실 시리즈 그림 ‘평정서역전도책’을 창작하게 했다.
그리고 이를 유럽으로 가져가 동판화로 제작하기로 했다.
건륭 27년부터 16폭의 화고가 나뉘어 프랑스로 운송되었다.
프랑스의 7명 조판 명수가 각각 제작했다.
조판인쇄 제작은 7년이나 지속되었다.
건륭 38년에 이르러 2백장이 그림으로 인쇄되었으며 원 화고 및 동판 원본 모두 중국으로 운송해 오는데 총 11년이 걸렸다.
회화작품 완성고를 본 건륭 황제는 아주 만족해 했다.
이 ‘황청직공도권’도 건륭의 의지에 따라 그린 것이다.
그림에서 그때 청나라와 교류가 밀접했던 27개 나라의 인물형상을 보아낼 수 있다.
2004년 9월, 고궁시계관 배치를 바꿔 주소를 보화동무로부터 새롭게 보수하여 면모를 바꾼 봉선전으로 이사했다.
봉선전은 궁내 황제의 조묘로 청나라 역대 제왕이 선조를 공봉하고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이곳에는 약 2백개의 아름답고 정교하며 공예가 뛰어난 청나라 궁정 시계가 진열되어 있는데 제작연대는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이다.
이런 시계는 2백년간 세계 시계발전사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때 시계제조업의 최고 수준도 체현했다.
중국은 명나라 말년부터 기계시계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청나라 강희 연간에 이르러 시계 제조업이 점차 흥기되었다.
궁에 시계를 만들고 수리하는 자명종처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광저우, 푸젠 및 창장 강 중하류의 난징, 쑤저우, 양저우 등 지역에도 점차 기계시계 제조업이 흥기되기 시작했다.
지금 보는 이 시계들은 건륭 연간에 청궁 조반처에서 만든 것이다.
온종일 자금성 내에서 그때 과학기술수준이 아주 높은 시계생산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기이한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광저우는 청나라에서 유일한 대외개방 항구이자 그때 민간에서 기계시계를 제조하는 중심이었다.
광저우 시계는 대부분 조롱박 등 길상의 의미가 담긴 기물형태로 만들어지거나 문자형식으로 축복을 전달했으며 장식에는 색깔이 산뜻한 법랑을 사용했기 때문에 민족과 지방특색이 짙었다.
청나라 중기, 궁내에 천문수학 등 과학의기가 적어지는 한편 정교하고 아름다운 기계시계, 장난감이 대량 나타났다.
직적적인 원인은 건륭 황제의 개인적인 애호때문이었다.
강희 시기, 궁정에서는 단일 실용성 시계만 생산했지만 건륭 시기에는 시계의 관상성에 치중점을 두면서 점차 시침이 가고 시간을 알리며 음악이 울리고 활동경관을 조성하는 등 여러 기능이 일체화되기 시작했다.
지어 외국에서 진상한 시계도 건륭의 구미에 맞춰야 했다.
이것은 고궁에서 가장 큰 장난감시계인 동도금 사자인종으로 높이는 231센티미터이다.
사자인종이라 이름을 지은 것은 시계의 받침대에 서양인모양의 로봇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시위를 올려놓으면 로봇이 붓을 들고 ‘팔방향화, 구토내왕(주변에서 모두 청나라의 신하가 되어 굴복한다는 뜻)’란 여덟자를 쓰는데 가로금, 내리금, 삐침, 벌림에는 모두 필봉이 있으며 인형의 머리도 좌우로 움직인다.
서양인이 붓글씨를 쓰는 것은 건륭 황제의 창의에 따라 개조된 것이라 기재되어 있다.
이 사자인종은 건륭 황제가 가장 아끼던 시계이다.
그가 퇴위하여 태상황으로 있을 때 사자인종을 자신이 양로하는 녕수궁으로 가져가라는 명을 내렸다. 수시로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상라전차종은 영국 군대가 전쟁에 나서는 정경을 반영했다.
코끼리의 코, 꼬리, 눈은 모두 움직일 수 있다.
디자인이 하도 뛰어나 시간을 계산하는 시계라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더욱 기이한 것은 전차의 바뀌가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는 점이다.
18세기의 유럽은 과학기술이 크게 발전하는 시기로 기계제조업이 아주 활성화 되었다.
특히 영국의 시계 제조수준이 유럽에서도 으뜸을 자랑했다.
건륭은 청나라가 백여년간 축적한 재부로 광저우 해관을 통해 영국 시계를 대량 구입했다.
갑자기 영국 시계가 궁내의 여러 전당에 가득 채워졌을 뿐만 아니라 황족과 귀족, 왕공대신의 새로운 총애 대상으로 되었다.
이에 종실신분인 소련이 아주 감격해 했다.
“최근 서양에서 만든 자명종시계는 기이하고 요상한데 웨둥으로부터 왔다. 사대부들이 다투어 구입해서는 집에 하나씩 챙겨놓는데 장난감인줄로 안다.”
분명 무역수단으로 중서교류의 경로가 청나라 초기보다 훨씬 넓어졌으며 유럽 과학기술이 중국으로 유입되는데 더 좋은 조건이 구비된 듯 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강희부터 황제의 개인적인 애호가 서양물품이 중국 궁정에로의 유통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런 서양 과학기술과 예술결과의 결정이 더 많게는 향락의 놀이개로 이용되었다.
비록 서양시계가 육속 궁전의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그들의 시곗바늘이 이 왕조를 서방의 선진적인 절주와 연결시키지는 못했다.
현재 여전히 정교하지만 이미 낡아버린 시계가 조용히 그제날의 봉선전에 진열되어 있다.
이들은 전에 공봉했던 그때의 청나라의 선조처럼 사람들의 무한한 탄식과 감탄을 자아낸다.
청나라 말기, 전등 전화 등 현대문명을 대표하는 과학기술성과가 육속 자금성에 나타났다.
지어 서방의 요식 및 오락방식도 궁으로 인입되어 황제의 생활을 풍부히 했다.
하지만 전에 그들이 시계를 대했던 것처럼 이 궁전의 주인은 이미 문명의 성과를 그저 향락의 도구로만 간주하는데 습관화된 듯 했다.
하지만 이때 서방 열강들은 이런 기물에 숨겨진 놀라운 힘을 빌어 견고한 선박과 예리한 대포를 제조해 중국의 문을 타파했다.
자금성은 전에 서양 공물 전시부스와 선진적인 과학기술의 올가미였다.
뛰어난 기술을 장악한 장인의 창조력을 독점했는데 그들이 창조한 기물은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졌다고 해도 모두 화려함이라는 족쇄가 채워져 한층한층의 암홍색 궁성을 뛰어넘지 못했다.
오늘날 가장 먼저 중국에 유입된 서양 악곡이 자금성에서 다시 울려퍼질 때 교류와 발전이 이미 이 시대에 가장 유행되는 선율로 되었다.
여기서 발생한 역사 그리고 역사속의 인물과 이야기를 더듬어보고 수백년간 성패흥쇄 운명의 비밀을 밝히는 것도 이제는 답안을 찾은 듯 하다.

출처:CCTV.co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북경 (5)자금성 (12)서안 (2)먹거리 (19)티벳 (6)내몽고 (4)아름다운중국 (6)오악 (7)기타 (9)
게시물 검색
금면왕조 金面王朝 GOLDEN MASK DYNASTY - 할인예약으로 알뜰여행 하세요!!
북경시 조양구 왕징 리와이리공위 3단원       北京市 朝阳区 望京 里外里公寓3单元      
공연장 주소 : 北京市 朝阳区 东四环北京欢乐谷 华侨城大剧院   중국 위챗 :
(주)포인트투어    서울시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605호    카톡 :    전화 : 02) 1234-1234    핸드폰 : 010-1234-1234   
차와 다과를 즐기면서 변검 쇼, 마술, 중국 전통악기 연주, 경극, 묘기, 만담 등 다양한 장르의 중국 전통문화를 한번에 감상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