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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다큐]고궁(08)-고궁에 수장된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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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셀프차이나 작성일14-05-12 15:47 조회624회 댓글0건

본문

이것은 옥벽이다. 여기에 얼마나 오래 묵묵히 서있었는지 모른다.
옥벽의 바로 앞에 양심전이 있는데 여기는 청나라 황제가 업무를 처리하고 거주하던 곳이다.
황제가 보좌에서 정무를 처리할 때 수시로 맞은 편 멀지 않은 곳에 세운 옥벽을 볼 수 있다.
이 옥벽은 ‘면벽’의 뜻에서 얻은 것인데 황제가 때때로 자신의 일언일행을 반성하도록 일깨워준다.
공자는 ‘예기’에서 “군주의 덕행을 옥에 비할 수 있다”고 적었다.
전에 옥은 중국인의 도덕을 가늠하는 상징이었다.
옥기가 황실에 들어오면서 궁전에서 대체할 수 없는 지위를 차지했으며 많은 중요한 장소에서 특수한 의미가 부여되었다.
“황제가 영국 국왕에게 증정하는 첫 선물을 나더러 전달하라 했다.
그 선물은 여의였는데 1영척반 길이의 흰색 돌로 위에 꽃이 새겨져 있었다.
중국인은 이 선물이 아주 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난 이 물건이 그렇게 값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 글을 남긴 자가 마거얼니이다.
1793년, 청나라 건륭 58년 8월 10일 이른 아침, 중국 건륭 황제가 영국 특사 마거얼니를 접견했다.
쌍방은 이번 접견에서 서로 선물을 교환했다.
건륭 황제는 백옥여의 한 개를 영국 국왕에게 증정하는 외 마거얼니와 조수에게도 녹색 옥여의를 각각 증정했다.
접견식을 마치고 여러 궁전을 참관한 마거얼니는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또 매 궁전의 보좌 옆에 모두 한 점의 옥여의가 놓여 있었는데 형태가 영국 국왕에게 증정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비록 마거얼니는 여의가 평화롭고 번창하기를 바라는 축복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가 별로 값없다고 여기는 아름다운 돌이 중국인들에게는 아주 진귀하고 가치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은 알지못했을 것이다.
돌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옥이다.
예로부터 중국인은 이같이 아름다운 돌을 유난히 좋아했다.
옥은 정교하고 활력이 넘치는데다 온화하고 함축되어 동방인의 기질과 잘 맞물린다.
한 조각의 옥이 형성되는데는 억만년의 시간이 걸리며 천지만물의 정화가 응집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자금성에서 옥의 존귀한 가치를 가장 잘 체현하는 기물은 바로 지고무상한 황권을 대표하는 황제의 옥새이다.
여기는 교태전으로 자금성 내정 후삼궁 가운데의 하나이다.
청나라 황제가 사용한 25개 보새가 바로 이곳에 수장되어 있었는데 그중 23개 보새는 옥석으로 새겨 만든 것이다.
자금성이 건설된 후의 5백여년간, 이곳에는 늘 이런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어떤 신비한 사람이 신비스러운 보따리를 지고 궁에 들어가 보물을 바치려 했는데 모두 전설 속의 진나라 전국 옥새를 찾았다고 말했다 한다.
사서에 춘추시기 유명한 천연 보옥인 화씨벽이 훗날 진나라의 전국옥새로 조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시황은 이 보옥의 신력을 빌어 왕조가 천추에 길이 남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 후의 왕조들은 모두 이 전국 옥새를 얻고 소유하기를 갈망했다.
전국새의 유전은 1천 5백여년에 이르는 중국 역사를 잇고 있다.
명나라가 원나라를 뒤엎었을 때 몽골부락에서 옥새를 막북으로 가져갔다.
그때부터 진정한 ‘전국새’가 종적을 감췄으며 여러가지 모조품이 대량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자금성에 보존되어 있는 것인데 언제 누가 ‘전국 옥새’라고 진상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전문가의 분석결과 실은 흙토로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됐다.
건륭 황제는 화씨벽의 전설에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그는 본조의 옥새를 더욱 중히 여겼다.
건륭 11년 이전, 교태전에 간직된 보새가 39매에 달하고 진짜와 가짜가 섞여 있었는데 이중에는 가짜 전국새도 포함되어 있다.
건륭은 진나라 옥새가 진짜라 할지라도 청나라의 보새와 함께 두면 안 된다고 여겼다.
건륭 13년, 그가 ‘보보(宝谱)’를 위해 만든 ‘어제교태전보보서’에서 ‘예로부터 보새는 정해진 수자가 없었다.
현재 교태전에 간직된 옥새의 연대가 너무 오래 되었기 때문에 기록도 진실하지 않고 중복적인 것이 있어 고증을 일층 거치고 순서에 따라 배열해야 한다.
보새는 총 25매이다.’고 적었다.
이는 건륭 황제가 ‘주역대연’ 천수가 20하고 다섯이 더 있다는 것을 근거로 정했다.
그는 예로부터 어떠한 왕조도 영원히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보새의 수자를 25로 정했는데 바로 ‘주역’에 적은 것처럼 청나라 강산이 25대에까지 이어나갈 수 있기를 하느님에게 빌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건륭 이후 황위가 6대까지만 이어졌다.
옥새 외에도자금성 곳곳에서 옥기를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생활용품일 뿐만 아니라 가장 주요한 장식품이기도 하다.
여러 궁전의 진열장에 배열한 예술품 가운데서 옥기가 백분의 80이상을 차지했다.
옥의 색깔만 5가지에 달했는데 각각 흰색, 청색, 노란색, 벽색, 묵색이다.
고궁의 옥기에는 옥의 여러가지 종류가 포함되는데 그중 신장 허톈옥이 주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양심전 보좌 뒷면의 통로를 지나 우리는 황제가 휴식하는 후침전을 찾았다.
여기에는 많은 옥기가 진열되어 있다.
문에 들어서는 동서 양켠에 2개의 벽옥반이 배열되어 있다.
그릇의 중앙에는 시 한 수가 새겨져 있다.
이 시는 대체로 1755년부터 1760년 건륭이 준거얼을 평정하던 역사를 묘사한 것이다.
서역을 평정한 후 허톈옥의 대내운송 통로가 개통되었다.
이는 중국 궁정 옥기의 제조에 아주 큰 의미가 있다.
이후부터 신장 허톈옥의 채굴, 운송에서 제작에 이르기까지 법률적으로 황실이 독점했다.
1787년, 청나라 건륭 52년, 8월 16일, 조반처의 일부 관리들이 대내환관의 배동아래 손에 자를 쥐고 조심스럽게 낙수당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치수를 재면서 조심스럽게 토론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동원하는 걸로 보아 대체 무얼 진열하려는걸까?
이것은 신장 허톈 미러타산의 거대형 옥석 조각품인 ‘대우치수도옥산’이다.
5천여 킬로그램에 달하는 옥조각은 오늘에도 여전히 세계의 으뜸으로 불리우고 있다.
쿤룬산맥에 위치한 미러타산의 해발은 약 5천미터로 1년내내 눈이 쌓여있고 공기가 희박하다.
해마다 7, 8, 9 석달이 되어야 산에서 옥료를 채굴할 수 있다.
그때 가장 원시적인 채굴조건으로 말미암아 이 옥료가 산 위에서 산 아래로 이동되는데 적어도 2, 3년의 시간이 걸려야 했다.
채굴하는데도 이렇게 어려운데 5천여 킬로그램이나 되는 옥료를 만리 떨어진 베이징에까지 운송해 가려면 멀고도 험난한 길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극히 불가능했다.
이 거대한 옥료를 3년이란 시간을 들여서야 자금성까지 운송해왔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허톈옥이다.
높고 험준한 쿤룬산의 해발이 4, 5천미터 되는 곳에는 1년내내 흰눈이 쌓여 있는데 아름다운 허톈옥 대부분이 바로 여기에 매장되어 있다.
산에서 채굴한 큰 옥료와 물에서 얻는 진귀한 자옥으로 하여 이곳은 널리 이름을 알린 보배 땅으로 되었다.
해마다 7, 8월이 되면 산홍수가 생기면서 대량의 산석을 바이위허 하류로 가져간다.
그중의 일부 옥석은 해마다 날라가고 일부는 씻기면서 가장 견고한 부분만 강바닥의 양쪽에 남게 되었는데 형태가 자갈과 비슷하고 표면은 아주 매끌매끌하다.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옥 가운데의 최상품이라 부르는 자옥이다.
옥의 채굴과 운송은 궁정에서 독점했으며 가장 아름다운 옥석도 황실만의 전용이었다.
이는 1767년 청나라 건륭 28년 신장 지역에서 봄철에 진상한 명세서이다.
명세서에는 그해 신장 지역에서 옥료를 진상한 수량, 종류 및 중량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중 이번만해도 허톈에서 진상한 옥이 79개, 예얼창하에서 진상한 옥이 95개로 총 중량이 5백여근에 달했다.
신장 주재 대신이 해마다 봄과 가을에 적어도 두번은 옥료를 베이징으로 운송해 갔다.
건륭시기, 해마다 적어도 4천근 안팎의 옥석이 허톈으로부터 베이징으로 운송해 갔는데 가장 많을 때는 1만여근이 될 때도 있었다.
총족한 옥료가 있음으로 하여 궁정은 대규모적으로 옥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때 자금성 양심전 조반처에 옥작이라 불리는 기구가 있었다.
날마다 4, 5명 옥공이 여기서 황제를 위해 옥을 조각했다.
이 부서는 가장 먼저 청나라 순치 초기에 설립되었다.
건륭시기에 이르러 옥기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자금성에 또 여의관을 설립했는데 거기에도 장인이 옥을 조각하고 있었다.
건륭시기의 다수 옥기 정품은 모두 이 두 곳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청나라 말년 당영작이 ‘옥설’이란 책을 썼는데 여기에 나오는 옥작도는 청나라 황실에서 옥을 제작하던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리붸썽 공예미술대가:
옥료를 채굴하고 거친 소태를 구워내고 모형을 만들내는데로부터 세밀한 제작, 마지막 광택을 내는데에 마지막 마무리작업까지 합치면 총 5개 절차입니다.
철기가 생겨나면서부터 전문적으로 옥을 제작하는 업종이 완벽해졌는데요.
다시 말해 발로 밟고 수공으로 가는 이런 옥제조 방식이 3천여년을 이어나가면서 전혀 다른 변화가 없었습니다.
현재 이런 기계설비가 비록 빠르고 없으면 만들어내지 못하는 물건도 없습니다.
하지만 빠르기 때문에 옥 표면의 감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신장 미러타산에서 운송해 온 거대형 옥료는 자금성에 도착한 뒤에도 여정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조각을 궁전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천리 떨어진 양저우에서 했기 때문이다.
그때 궁정에 대형 옥이 있거나 옥조각에 바쁠 때면 옥료를 쑤저우, 양저우로 보내 제작했다.
거기는 그때 전국에서 경제력이 가장 강한 지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랜 옥제작 전통도 있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옥제작 기지로 되었다.
현재에 이르러서도 이런 곳은 옥조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다.
양붜다 전 고궁박물원 부원장
건륭 연대에 옥기에 열광하는 그런 고조가 옥기를 제조하는 중심에서 함께 나타났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쑤저우, 양주어, 난징, 항저우지요.
중국 역사에서 한 왕조에 몇 개의 (옥기)제작중심, 중심구가 동시에 나타나고 그토록 번영한 양상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전에없는 것이었습니다.
건륭시기의 양저우는 조각 기예가 절정에 이르렀다.
시장에 정교하고 아름다운 옥기가 대량 출시되었는데 공예가 아주 복잡했다.
이런 것들이 공물로 황제에게 진상되었지만 결국 건륭 황제는 엄하게 꾸짖었다.
그러면서 이런 옥기를 더는 투조하지 말라는 어지를 내렸다.
용기를 투조하고 나면 쓸모가 없어지는데다 가령 용기가 아닐지라도 전반적으로 투조하고 나면 옥의 천연적인 아름다움이 완전히 없어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어지는 그때 옥기제조에서의 사치스러운 풍기를 제때로 간파했다.
이 청옥육출극유개이는 건륭 연간 궁정 조반처의 정품이다.
건륭의 지시에 따라 제조한 순박하고 순수한 본 모습을 되찾은 기물이다.
그 거대한 옥료가 수로를 통해 3개월을 거쳐 양저우에 운송해 간 뒤 건륭 황제는 이 옥석에 아래와 같은 글귀를 적었다.
뜻인즉, 이 거대한 보물로 옛날 대우치수의 사적을 널리 알리려는 것이지 근근히 관리의 향락을 만족시키는 놀이개에 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송나라인의 명화를 모방한 대우치수도 옥산은 양저우에서 6년을 거쳐서야 조각되었으며 건륭 52년에 베이징으로 운송했다.
그후로는 줄곧 자금성의 낙수당에 놓뎠다.
가까운 거리에서 고궁의 보물을 감상해 보자.
높이 224센티미터(동좌는 제외), 너비 96센티미터, 중량은 약 5천 3백킬로그램이다.
옥에는 험산준령과 폭포급류, 온 산을 뒤덮은 울창한 소나무가 조각되어 있으며 동굴은 깊고도 신비스럽다.
가파른 절벽에서 노동자들이 줄을 지어 산을 깎고 물을 다스린다.
고궁의 보물이 허톈에서 베이징으로, 또 베이징에서 양저우로 운송해갔다가 다시 운송해 오고 최종 완성되기까지 전후로 총 10년의 시간이 걸렸고 수십만명의 인력이 동원되었으며 사용한 은냥은 대체 얼마인지 계산할 수조차 없다.
건륭 연간은 자금성 궁정 옥기가 가장 번영하고 번창하게 발전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옥조각은 대체로 크고 두꺼웠을 뿐만 아니라 조형이 깔끔하면서도 대칭되었는데 특유한 황실풍격을 살렸고 중국 옥기 공예의 새로운 절정을 창조했다.
때문에 서방은 18~19세기에 청나라 옥기를 아예 ‘건륭옥’이라 불렀다.
건륭 황제는 옥기를 아주 좋아했다.
현재 고궁박물원에 수장된 3만 개의 옥기 가운데서 대다수는 그가 수장한 것이다.
건륭은 아들이자 훗날의 가경 황제의 이름을 옹염이라 지었다.
염은 아름다운 옥을 뜻한다.
옹염의 열여섯 형제도 모두 옥기의 이름을 본따 명명했다.
건륭은 훗날 사람들에게 ‘옥에 미친 사람’이라 불렸다.
건륭이 가장 좋아하던 진귀한 옥기는 백십건란 상자에 수장되어 있다.
백십건은 총 9층으로 되어 있는데 층마다 여러개의 서랍이 있다.
그리고 서랍에 넣은 옥기마다 전용 격자가 있었는데 격자의 형태가 옥기와 꼭 들어맞았다.
이것은 ‘홍력감고도’이다.
정관붕이란 궁정 화가가 건륭 황제가 옛 옥을 감상하는 정경을 진실하게 기록한 것이다.
군주가 즐기면 그 아래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행되기 마련이다.
그때 옥을 수장하고 감상하는 것은 궁정 내외의 유행으로 되었으며 옥기도 대신들이 공물로 바치는데서의 최고 인기품이었다.
1754년 건륭 19년 12월 29일, 화석이 친왕 홍효의 진상 명세서에 한목공벽, 문대, 문완이 있었다.
1791년 건륭 56년 4월 29일, 화석숙 친왕의 진상 명세서에는 옥합, 옥세, 옥수 등이 있었다.
중국 제1역사문서관에서 우리는 그때 건륭이 가장 신임하던 대신 화신이 건륭 황제에게 바친 공물 명세서를 찾았다.
위에는 옥불, 옥 과일쟁반, 감옥향훈 등 많은 옥기가 열거되었다.
이것은 그때 화신이 직접 적은 사인이다.
하루, 건륭 황제가 대신들이 공물로 바친 옥기를 감상하고 있었는데 한 옥배가 그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 옥배는 겉보기에 한나라의 품격이 짙었다.
하지만 만지면 혼탁하고 거칠다는 느낌이 들었다.
견식이 넓은 건륭 황제는 이상하게 생각하여 옥조각 가문 출신인 옥장인 요종인을 불렀다.
결과 요종인은 보자마자 “이건 소인의 선조가 만든 것이옵니다. 대대로 물려내려온 솜씨인지라 알아볼 수 있었사옵니다.”고 말했다.
후에 건륭 황제는 ‘어제옥배기’에서 전문적으로 이 사건의 경과를 서술했다.
한편 요종인은 ‘가짜 옥배를 만든 시간에 따라 임금을 삭감하게 되는데 한달이 걸렸으면 한달 임금을 삭감하고 두달이면 두달 임금을 삭감한다’는 건륭 황제의 어지를 받았다.
옥기를 감상하려면 경험과 지식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일부 고옥기는 연대가 오래고 그때 문헌기록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일부 기물의 본 역할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때문에 옥기를 감정함에 있어 수장가들도 실수할 때가 있었다.
하물며 ‘옥에 미친 사람’이라 불리우는 건륭 황제도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이렇게 밖이 네모나고 안이 둥글며 속이 빈 옥기는 건륭이 아주 좋아하는 것이다.
그는 연구를 거쳐 이것이 옛 사람들이 무거운 물건을 들 때 사용하는 보조도구라고 여겼으며 강두(釭头)라 불렀다.
건륭 황제는 자기 생각을 시로 지어 옥기에 새기도록 했다.
그리고 이런 통모양 옥기의 일부는 황제 책상 위에 놓은 붓 통으로, 일부는 동시렁과 덮개를 보태 꽃을 꽂았는데 건륭 황제가 수시로 감상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가 세상 뜬 90년 후 광서 15년, 고옥학자 오대징의 고증결과 건륭이 강두라 부르던 것이 실은 ‘옥종’으로 고대 제왕이 대지에 제사를 올릴 때 사용하는 예기인 것으로 밝혀졌다.
고궁박물원에 수장된 옥기는 시대에 따라 원나라 이전의 고옥, 명나라 옥기 및 청나라 옥기 세 부분으로 획분했다.
원나라 이전의 옥기 가운데는 당대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정품 및 세상에 전해진 고옥 가운데의 진품이 있다.
이중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원나라 각 역사시기의 대표적인 작품도 있다.
서화, 도자기, 청동기, 옥기 등 여러 종류의 중국 고대 문물 가운데서 옥기 수장 역사가 가장 오래다.
이 옥수형결은 자금성에 오래 수장한 옥기 가운데서 가장 오랜 작품으로 신석기시기의 홍산문화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세월의 침윤으로 표면에 많은 반점이 생겨났는데 이는 고옥의 특유한 특징이다.
이 옥결은 동물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옛 사람들이 동물에 대한 숭상을 반영한다.
이것은 전국시기의 옥벽이다.
‘주례’는 원고 때 사람들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데 사용한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옛날에 옥기는 제사를 올릴 때 사용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사람들은 옥기가 대자연과 모종 신비한 연계가 있다고 여겼다.
금은, 자기와 달리 옥기 제작은 옥석 자체의 천연적인 조건에 많이 의거한다.
옥기를 가공하는 데서의 최고 경지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옥의 조건에 따라 옥료의 형태, 색깔을 교모하게 이용함으로써 장인과 천연조물이 혼연일체가 되는 효과를 이루는 것이다.
아마도 여기에 옛 사람들이 인간과 자연관계에 대한 소박한 이해가 담겨있는 듯하다.
청나라 비취배추와 육형석은 옥기를 ‘교모하게 만든’ 대표이다.
비취배추는 옥료 가운데서 흰 부분을 겉대로 조각하고 초록색 부분은 잎사귀와 그 위에 있는 곤충으로 조각했는데 흰색과 녹색의 과도가 아주 교모하고도 자연스럽다.
육형석은 색깔이나 무늬가 모두 진짜처럼 만들어졌는데 사람들은 마치 훙사오러우(红烧肉)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듯 하다고 여겼다.
이 두 가지 작품은 현재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에 수장되어 있다.
이 옥석은 중간에서 한 덩이의 소태를 꺼내갔다.
쑤저우 장인이 자투리 재료로 ‘동음사녀도’를 조각해냈다. 이
는 강남 정원풍경을 담은 작품이다.
주변에는 무성한 바나나잎과 정교한 가산이 있고 옥료 중간의 움푹 파인 곳을 따라 반월형의 문이 만들어져 있는데 반쯤 연 문의 안과 밖에 소녀가 각각 한명씩 서서 문틈으로 서로를 훔쳐보고 있다.
건륭 황제는 전에 공예가 뛰어난 이 작품을 춘추시기의 화씨벽과 동등하게 대했다.
황권을 대표하는 옥새나 정취와 풍아가 담긴 장식품을 막론하고 이렇듯 정교하고 아름다운 옥기가 세세대대 전해졌다.
아쉽게도 이런 예술품을 창작한 장인과 예술일군들의 이름을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옥기계에서 한 사람의 이름은 누구나 다 안다.
그가 바로 명나라 옥조각 대가인 육자강이다.
리붸썽 전문가:
그의 작품은 크든 작든 모두 ‘자강’이란 낙관이 찍혀 있었어요.
이에 연관된 많은 이야기가 민간에서 전해지고 있는데요.
전에 황제가 갑자기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그를 궁으로 불려갔대요.
그때 황제는 “자강아 너의 낙관을 찍지 말고 물건을 만들거라”는 명을 내렸어요.
결과 육자강은 돌아가 고심하던 끝에 한 필의 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자연히 낙관도 찍지 않았지요.
그때 황제 신변의 대신도 반복적으로 그 물건을 보았는데 낙관이 보지 못했대요.
황제도 지의를 들었구나하고 생각했던거죠.
하지만 어느 한번 재상이 자세히 보다가 말 귀안에 새긴 ‘자강제’란 세 글자를 발견했는데요.
감히 황제한테는 알리지 못했대요.
시간이 흐르면서 황제도 결국 발견했지요.
하지만 황제는 오히려 기뻐하면서 육자강에게 벌을 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육자강의 기예가 뛰어났기 때문에 청나라 초기부터 육자강의 작품을 모방하여 조각한 ‘자강패’가 사회에서 유행되기 시작했다.
리붸썽 전문가:
이런 자강패가 예전 사람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육자강이 창작한 모양은 장방형인데요.
그 장방형은 아주 특별했습니다.
현재로부터 보면 황금 분할비율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아주 예뻤어요.
측면이나 테두리, 그리고 파내고 평평하게 하는 등 공예는 훗날 사람들이 조각해내기 아주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현재까지 전해진 자강 작품이 너무 많아 진위를 판단하기 어렵다.
현재 고궁박물원에 수장된 자강 제관의 옥기, 그리고 위에 새긴 글자체도 서로 다르다.
하지만 진짜던 모조품이던 모두 예술정품으로 불리우기에는 전혀 손색이 없다.
현재, 자강 제관의 옥기는 많은 수장가들이 추구하는 진품으로 되었다.
육자강 외에도 역사적으로 영정, 주영태 등 궁정 옥조각 명가들이 많다.
그들은 수많은 옥조각인의 대표이다.
바로 이들이 중화 예술 보물고에 영원한 휘황을 남겼다.
건륭이 세상을 뜨자 청나라의 국력이 빠르게 쇠약해졌다.
이 때문에 옥기에 대한 수요도 크게 줄어들었고 옥기의 제조도 저조기를 맞이했다.
이것은 건륭의 아들 가경시기 조각한 방고벽옥출극존이다.
이때 자금성에 해마다 신장으로부터 운송해온 옥석이 2천여근밖에 안 되었는데 이는 건륭시기의 5분의 1에도 못미쳤다.
도광 원년, 황제는 허톈, 예얼창에서 잠시 옥료를 진상하는 것을 중지한다는 어지를 내렸다.
훗날 청나라가 멸망하기까지 옥료를 공물로 진상하는 것을 더는 회복하지 않았다.
자금성의 옥기 수장은 청나라 말기 때 잠깐의 흥성시기를 맞이했다.
그때의 통치자였던 자희 태후가 옥기를 아주 좋아했기 때문이다.
여기는 내정 서육궁 가운데의 장춘궁으로 자희가 그때 거주하던 곳이다.
여기 곳곳에서 자희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옥기를 볼 수 있다.
국가의 내유외환도 자희가 사치에 대한 수요를 가로막지는 못했다.
자희 태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왕공대신들은 도처에서 진기한 보배를 모았다.
자희가 사용했던 옥장식품과 놀았던 옥기는 3천개 단향목상자를 꽉 채울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자희는 옥이 없으면 안 되었다.
차를 마실 때는 옥 찻잔, 식사할 때는 옥 젓가락, 옥 숟가락, 옥 그릇을 사용했다.
1900년, 8국 연합군이 쳐들어왔다.
자희가 베이징에서 피난을 떠날 때도 가장 소중히 여기던 옥기를 챙기는 일은 잊지 않았다.
자희가 가장 좋아하는 옥기는 윈난, 미얀마에서 온 비취옥이었다.
자희의 애호는 민간의 비위사용에 영향을 주었다.
비취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유행도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오늘날, 그때 자희 태후가 거주했던 녕수궁은 고궁박물원에 의해 진보관으로 설치되었다.
전에 제왕들만 향유할 수 있었던 옥기를 이제는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흔상하고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고궁박물원에 수장된 옥기는 3만 여점에 달한다.
이런 보배에는 오랜 세월을 거쳐 대자연이 조금씩 품어낸 정화가 응집되어 있으며 예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복잡다단한 변화의 풍파를 뛰어넘었다.
이들은 마치 이 궁전에서 생활하는 정령처럼 오래된 궁전에서 더욱 화려한 빛을 발하고 있다.
옥기는 세월이 흐르면서 문화사상의 깊이를 축적했다.
그리고 현인과 후인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들이 속삭이는 무언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려 보기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출처:CC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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