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114
북경맛집
공항픽업
렌트카
가이드
회원가입
로그인
모바일버전
CCTV다큐동영상

[자금성] [다큐]고궁(07)-고궁의 서화

페이지 정보

작성자 셀프차이나 작성일14-05-12 15:43 조회572회 댓글0건

본문

고궁은 중국 회화를 소장하고 보관하고 연구하는 가장 중요한 곳이다. 중국 궁정 회화소장품은 중국의 전통문화와 민족정신, 기질을 가장 생동하고 가장 직관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본 회는 고궁의 회화소장품의 집약, 유실과 귀환을 민족의 운명, 중국 문화 명맥의 발전과 연속과 연결시켜본다. 
이 곳은 황제가 서화를 감상하던 사적 공간이다. 200여년 전, 홍력이라고 하는 황제가 이 6제곱미터도 안되는 작은 난각에서 혼자 조용히 세가지 절세의 진품이라 하는 서예를 감상하곤 했다. 그것들은 왕순의 《백원첩》, 황헌지의 《중추첩》 그리고 황희지의 《쾌설시청첩》이다. 홍력은 이것들을 대청제국의 바다처럼 많은 궁정 서화소장품가운데 가장 훌륭한 세가지라며 특별히 이 작은 방을 ‘삼희당’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제7회 고궁의 서화
[해설]
서화를 사랑한 이 황제는 전반 청왕조의 궁정서화 수집을 완성했고 중국의 서화소장 역사에 찬란한 한 획을 그었다. 건륭황제는 자기가 집정하던 반세기동안 이 황실 궁전을 중국에서 가장 큰 서화박물관으로 만들었다.
현재, 사람들이 이 곳에 있으면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은 이 궁전의 이런 곳에 중국 역사상 가장 정교로운 마음을 증명하는 것들이 보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근 600년이나 되는 세월에 바로 이 궁전에서 그들은 화하문화의 심미적 가치와 관념을 전달하고 있었다. 현재 그들은 여전히 우리 이 민족의 내심세계에 깊이 들어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중대한 임무를 짊어진 황제에게 서화 소장은 개인의 보잘것 없는 소일거리나 애호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히려 홍력이 황제었고 성세의 제왕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런 고상한 정취가 한차례 전예없는 서화 대규합을 일으켰다. 중국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은 거의다 그가 재위한 60년동안에 자금성으로 들어왔다. 현재 우리가 고궁박물원에서 볼 수 있는 진귀한 서화 문물들은 대다수가 홍력이 수집한 것이다.
먼저 건륭왕조 전 자금성의 서화소장 역사를 돌이켜 본다. 제일 먼저 이 황성에 들어 온 서화는 원조 때 궁정의 옛 소장품이었다. 승리자로서 명왕조는 전 왕조의 모든 유품을 접수했다. 원조 궁정에 보괜됐던 진귀한 서화들에 새 주인이 새 도장을 찍었다. 이렇게 살짝 찍어놓으니 역사는 또 한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나 명왕조의 개국황제 주원장은 전 조대의 서화에 별로 흥취가 없었다. 송조 대화가 리공린의 뛰어난 화법이 그에게는 대량의 군용물자를 운반하는 화면에 불과했다. “수많은 말들이 들판에 방목되니 후세 자손들이 변방의 우환을 막는데 유익할 것이다” 말 등의 황제가 마음에 든 것은 군마를 대량 준비한다는 전략적인 뜻 뿐이었으리라.
전반 명왕조의 궁정에는 적극적인 서화 소장이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있다면 죄를 범한 대신의 가산을 몰수해서 얻은 것 뿐이다.
만력 10년, 서화를 대량 소장한 재상 장거정이 죽자 그가 생전에 사리를 도모한 사실이 점차 정적에 의해 밝혀졌다. 만력황제는 역사적으로 드물게 성격이 괴상한 사람이었다. 그의 가장 큰 특점은 인색하고 재물을 탐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만 천하를 가진 사람이 왜서 금은재물에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장거정에게 많은 재산이 있다는 말을 듣자 침묵만 지키고 있던 만력은 드디어 분노를 터뜨렸다. 재산을 몰수하는 행동이 신속히 시작됐다.
이렇게 대신의 재산을 몰수해 얻은 서화가 궁정의 소장품으로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차례 재산의 이전일 뿐 모든 과정이 예술과는 관계가 없는 듯 했다. 소장에 한계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명왕조의 궁정 서화는 끊임없이 유실되기만 했다. 주요 원인은 뜻밖에 군사적 지출이었다.
[후중량]
숭정 시기는 명 말기였습니다. 그 때는 두가지 전선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국내에서 의병을 토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족 청나라와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군사적 지출이 국고를 텅 비웠습니다. 의병이 성을 포위했을 때 ‘명계북략’ 기록에 따르면 숭정황제는 궁에서 30만냥을 겨우 수탈해 군량을 도왔습니다.
[해설]
숭정황제가 매산기슭에서 목을 매 자살했을 때 자금성은 이미 껍질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새 조대가 왔다.
관외에서 온 정예 기병은 신속히 정통적인 중국문화에 관심을 가졌다. 이 왕조의 ‘성세’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개명하고 깊은 한문화 수양을 가진 군주를 가졌다.
강희황제 주변에는 한족 문관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황제의 각별한 우대를 받았다. 여기에서 특별히 지적할 것은 고사기라고 하는 사람이다.
[라이신샤]
그는 강희 주변에서 때로 강희가 지리지식이나 풍속인정을 물으면 인차 대답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또 강희가 시를 지으면 그는 인차 화답을 할 수 있어 강희의 환심을 크게 샀습니다.
[해설]
고사기는 아첨을 잘 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영리했다. 그는 황제에게 서화를 진상할 때 매우 담대했는데 황제를 속이기까지 했다.
그는 황제에게 진상한 서화를 ‘강촌소하록’이라는 책을 만들어 기록했다. 이 책에서 고사기는 매 서화의 외관과 특점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했지만 서화의 진위와 우열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사실 공개적으로 출판된 ‘강촌소하록’ 밖에도 고사기가 편찬한 서화목록에는 또 한가지가 있는데 후세사람들은 ‘강촌서화목’이라고 부른다.
[양단샤]
또 한가지는 개인의 사사로운 소장품에 대한 원부인데 중요하게는 두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한가지는 이 소장품에 대해 개인의 감정 의견을 적은 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이 작품이 황제에게 진상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친척이나 친구에게 선물해도 되는 것인지 이런 것도 다 적어두었습니다.
[해설]
고사기가 달아놓은 주해를 보면 그의 속셈이 한눈에 환히 보인다. 공예가 정교한 모조품은 황제에게 진상해도 되고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명작 진품은 자기가 영원히 비밀적으로 소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사기가 죽고나서 그의 모든 소장품은 황궁 내부로 흘러들었다. 그가 아무리 서화를 좋아하고 총명해도 그의 잔꾀는 시간과 황권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고사기가 죽은 지 32년이 지나 강희황제의 손자 홍력이 등극했는데 연호가 건륭이다. 건륭황제의 서화에 대한 사랑은 고사기에 비해 못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가장 아끼는 세가지 서첩을 감상하면서도 수중에 있는 황희지와 왕헌지라고 서명한 작품이 사실은 당송시기의 방본이고 왕순의 《백원첩》만이 동진시기의 진적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렇지만 이런 수장품도 충분히 자랑할만한 가치가 있다.
삼희당의 이 세가지 서첩처럼 천년 역사를 가진 서화작품들은 자금성에 들어가기 전까지 많은 위험을 경험했다.
우리 다시 한번 중국 서화소장 역사에서 가슴아팠던 재난들을 회고해보자.
1400여년 전의 남북조 시기, 양원제 소역이 강릉성에서 서위 군대에 포위되었다. 투항하기 전날 밤, 소역은 자기가 소장한 14만점의 천하 명작을 하루밤새에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었다.
1300여년 전, 수양제가 운하를 따라 양주로 가게 됐다. 동도 낙양에 소장된 서법 명화도 배편으로 함께 갔는데 도중에 배가 전복되면서 가지고 간 서화가 절반이상 물에 잠겼다.
지금부터 800여년 전, 금나라 병사가 변양을 점령하면서 송휘종의 거대한 소장이 흩어지고 잃어졌다.
천년동안 전해온 이 놀라운 사연들을 듣고나서 다시 홍력이 삼희서첩을 흔상하던 그 작은 방으로 돌아가 보면 건륭 연간이든 지금이든 옛 시대의 진품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알 수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서화의 집산과 흐름은 제왕의 운명, 왕조의 교체와 관련이 있었다. 현재 우리가 고궁박물원의 전시청에서 이런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것은 300여년 전의 정권교체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명조말기에 전쟁이 잦아지면서 대량의 송원 이전의 서화 진품이 민간에 흘러들었다. 청조 강희황제 때 사회가 점차 안정되면서 민간의 서화 정품이 소수의 대 소장가들에게 모였다. 건륭황제가 민간에서 서화를 수집하기 시작할 때는 그의 앞에 있는 것은 몇개 서화정품창고나 다름없었다.
이런 서화는 궁에 들어오기 전까지 민간의 주인들은 날인하는 방식으로 자기 흔적을 영원히 그림에 남겼다. 바로 이런 날인 흔적들이 매 서화작품의 운명의 흐름을 기록하고 있다.
이 그림은《설경한림도》라고 하는데 북송 대화가 범관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고궁에 소장되어 있었다. 지금은 톈진박물관에서 최고로 꼽히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완성돼서부터 계속 민간에 떠돌아다니다가 청조 강희황제 때 톈진의 안기라고 하는 대염상에게 소장되었다.
강희 후기에 안기는 톈진에서 소금을 팔아 부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고대 서화를 대량 수집하기 시작했고 자기 소장품 목록을 책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 《묵연회관》이다. 책속의 기록을 보면 그 때 안기가 소장한 서화는 수량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다수가 연대가 오래된 명가의 진품이었다.
그러나 건륭 초기에 톈진의 염전이 옮겨지면서 새로운 염상이 옛 염상을 대체하면서 안씨네 가문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안기 수중의 많은 서화 작품들이 잇달아 궁에 팔려갔다.
건륭황제가 얻은 안기의 소장품 가운데 특별한 산수화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한때 서화소장사에 웃음거리로 된 적도 있다. 그것은 바로 원조때 대화가 황공망의 명작 ‘부춘산거도’이다.
[쩡쥔]
황공망의 만년에 이것은 마지막 작품으로 가장 이름이 있습니다. 원조 때의 회화는 명청의 회화에 특별히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원조 때 회화에서 황공망은 첫손 꼽힙니다.황공망의 작품가운데서도 이《부춘산거도》가 제일 훌륭합니다.
그래서 추세린은 제발을 써서 황공망의 《부춘산거》가 왕희지의 《난정서》, 서법의 《난정서》와 같다고 했습니다.
[해설]
중국 문인의 최고의 회화작품을 그 후 300년간 세상사람들이 다투어 소장했다. 명조 말기, 오문경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것을 얻았다. 오문경은 이 작품을 매우 애지중지했다. 《부춘산거도》뒤쪽에 있는 제발에 기록된데 따르면 그는 밥을 먹거나 잘 때도 이것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란이 일어났을 때도 재산은 버리더라도 이 《부춘산거도》만은 계속 가지고 피란을 갔다 한다. 오문경은 이 그림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죽기 전에 그것을 태워 순장하려 했다.
당시 오문경은《부춘산거도》를 불속에 넣었다. 한 시대의 종사가 지은 명작이 곧 잿더미로 변하게 됐다. 바로 이 때, 오문경의 조카가 몰래 다른 그림으로 그것을 바꿔냈다. 그렇지만 구출해낸 《부춘산거도》는 이미 타서 두토막으로 되었다.
《부춘산거도》가 두토막으로 되자 오씨네는 그것을 각기 표구했다. 한토막은 표구를 거쳐 후에 전해진 《잉산도》가 돼서 현재 저장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작의 주제내용을 보류한 다른 한토막은 표구할 때 불에 탄 흔적을 감추기 위해 특별히 그림 마지막에 있는 동기창의 제발을 잘라내 그림의 앞에 붙였다. 이것이 바로 후에 홍력이 얻는 《부춘산거도》 무용사권이다.
다시 표구한 무용사권은 원작의 전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림속의 맑고 부드러운 필묵, 간결하면서도 깊은 예술적 경지가 남아 있었다. 중국 산수화의 새로운 풍격을 창조한 이 거작은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안기의 손에까지 갔다.
안기가 죽은 뒤 《부춘산거》 무용사권은 건륭 11년 겨울에 홍력의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 전에 홍력은 이미《부춘산거도》한권을 얻었는데 그것은 유명한 가짜《부춘산거》로 후세 사람들은 자명권이라고 부른다.
자명권은 명말 문인이 모사한《부춘산거》 무용사권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원 작자의 제사를 없애고 황공망의 제사를 위조했고 또 추지린 등의 제발도 위조했다. 이 모든 것은 홍력을 속이고 말았다.
사실 자명권이 위조됐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원조 때 서화에서 작자의 낙관은 회화의 뒤에 있지만 자명권은 작자의 낙관을 화면 위의 여백에 넣었다. 이것은 원조 때 서화의 특점에 분명히 맞지 않는다. 그러나 홍력의 서화 감상 수준으로는 이런 빈틈을 보아내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 위조된 《부춘산거》 자명권을 그는 보배처럼 곁에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진품인 무용사권이 나타났어도 그는 자기의 잘못된 판단을 고치지 않았다.
그는 무용사권이 모조품이라고 확고하게 선포하고나서 또 높은 가격으로 이른바 모조품을 사들였다. 이유는 이 그림이 진적은 아니지만 괜찮게 그렸기 때문이라는 것. 그는 특별히 대신들을 불러와 두권의 《부춘산거도》에 제발을 남기게 했다. 그림을 구경하러 온 대신들은 하나같이 예술에 대한 황제의 사랑과 진위에 얽매이지 않는 드넓은 흉금을 칭송했으며 누구도 감히 이것이 본래 진적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했다.
홍력의 감정결과가 황당무계하기는 했지만 안기가 가지고 있던 《부춘산거》 진적이 이때 궁에 들어간 것만은 사실이다. 바로 이 건청궁에 이 그림은 조용히 200년이나 보존되어 있었다. 1933년이 돼서야 이것은 다른 문물들과 함께 남으로 옮겨졌다. 현재 진짜와 가짜 두가지《부춘산거도》는 모두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에 보존되어 있으며 함께 중국 서화소장사의 그 웃음거리를 증명하고 있다.
기원 1799년, 홍력이 세상을 떴다. 그후 그의 아들 가경황제는 서화 소장에서 별로 성과가 없었다. 그것은 가경이 건륭처럼 풍아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더욱이 홍력이 이미 평생에 걸쳐 천하의 걸작들을 거의 다 모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물건에 대한 중시와 추모의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 가경황제는 건륭이 평소에 좋아하던 서화기물을 전부 봉쇄해 보관했다.이것이 바로 가경황제가 건륭의 주요한 서화소장품을 봉폐해둔 연춘각이다. 원 건물이 1924년의 한차례 화재로 훼손됐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당시 화가의 필묵을 빌어 그 모습을 볼 수밖에 없다. 홍력의 우아한 흥취를 전수받지 못했지만 가경 때에도 이 연춘각에는 일부 서화들이 더 들어갔다. 그가운데는 유명한 《청명상하도》가 있다.
《청명상하도》가 완성된 후 처음으로 이것을 소장한 사람은 송휘종이다. 그 후 전쟁과 조대교체로《청명상하도》 진적의 행방은 언제나 신비감으로 가득했다. 명조 때 재상 엄숭이 실각해 재산을 몰수당하면서 이 그림은 엄숭의 재산과 함께 궁에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안돼 이 그림은 또다시 궁에서 신비하게 사라졌다. 여기에서 관건적인 인물이 있는데 바로 《청명상하도》 에 마지막 제발을 남긴 명조 때 사람 환관 풍보이다.
[양신]
풍보의 이 제발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왜서일까요? 그것은 그가 이 물건이 궁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또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오늘 그는 이것을 어떻게 얻었는지 밝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생각을 바꿔 추리해보면 만약 황제가 직접 하사한 것이라면 ‘네가 좋아한다면 가지거라’라고 했다면 그는 대서특필해서 ‘황제가 어찌어찌해서 이것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어찌어찌 기뻤다’라고 했을텐데 그런 말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림이 좋다고만 했고 어찌 가졌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해설]
풍보는 광채롭지 못한 방법으로 《청명상하도》를 얻었다. 그때 황성의 항간에는 이런 이야기가 돌았다. 궁의 한 어린 환관이 몰래 《청명상하도》를 창고에서 훔쳤는데 도망칠 때 다른 사람에게 발각될가봐 당황한 가운데 그림을 궁전의 배수구멍에 숨겨두고 나중에 궁에서 빼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만 그날부터 시작해 큰 비가 연속 사흘동안 내렸다. 배수구멍속의 《청명상하도》는 물에 젖어 꺼냈을 때는 이미 곤죽이 되어버렸다 한다.
[양신]
이 이야기가 풍보의 낙관과 관계가 있을까요? 저는 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청명상하도》는 파손되지 않았고 물에 젖은 흔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거짓입니다.
여러가지 선색을 통해 지금의 서화 전문가들은 《청명상하도》가 파손되었다는 전설은 풍보가 자기가 그림을 훔친 사실을 덮어감추기 위해 고의적으로 날조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자금성을 떠난 뒤 《청명상하도》는 감감무소식이다가 가경 4년 즉 건륭황제가 세상을 떠난 그 해에 다시 이 황성으로 돌아왔다.
건륭황제가 세상을 뜨자마자 큰 권력을 가지고 있던 화신이 낙마했고 2년전 죽은 호광총독 필원은 화신과 내왕한 사실이 드러나 재산을 몰수당했다. 《청명상하도》는 또다시 몰수당한 재산 속에 나타났다.
이번에 그것은 소중하게 연춘각에 보관되었다. 평생 서화를 좋아했던 건륭황제였지만 결국 생전에 그것을 보지 못했다. 대단한 명성을 가진 《청명상하도》가 도대체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기에 사람들이 수백년간 그것을 끊임없이 탐해왔을까?
[양신]
우선, 그것은 매우 사실적인 작품입니다. 그러나 사실적이라고 완전하게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조직적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큰 장면을 교외로부터 시내 중심까지 그려가갔는데 그 사이에 포함된 내용과 사물이 매우 많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조직하고 개괄하면 전형적이고 대표성이 있을지, 그것을 처리한 구상이 매우 놀랍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여기서 다리 위의 복잡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인산인해에 서로 밀치닥거렸을 것이고 아래에서 큰 배가 다리 밑을 지날 때 돛대를 내려야 했을 것입니다. 매우 긴장한 상태이고 사람들이 돕고 싶어도 돕지 못하는 그런 정경이 이 속에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화가는 그것을 처리할 때 조직적이고 일사불란했습니다. 다음 표현수법입니다. 성문 어귀에 있는 저 거지를 보세요. 그에 대한 주변의 태도마저 우리는 알아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나귀를 타고 가면서 머리를 돌려 보고 있는데 돈을 주려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 마음까지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간단하게 몇획으로 그걸 보여주었습니다. 때문에 《청명상하도》가 사람을 황홀한 경지에 이르게 하는 비결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듯 정묘한 《청명상하도》는 자금성에 들어간 후 가경 10년에 《석거보급삼편》에 편입되었다. 그 후 청나라 궁에는 더는 훌륭한 작품이 들어가지 않았다. 건륭조의 눈부신 서화소장은 기재하여 책자를 만드는 방식으로 기록되었다.
일찍 건륭 8년에 홍력은 내부에 소장된 서화에 대해 한차례 대규모 정리를 하려 했다. 우선 불교와 도교와 관련된 작품을 목록 《비전주림》으로 편찬했다. 이듬해 전부의 서화작품이 포함된 《석거보급》이 편찬되기 시작했다. 이는 한차례 전예없는 규모의 정리작업으로 2천년동안 존재해온 중국 궁정서법회화 소장품에 마침표를 짓는 것으로 되었다. 완성된 《석거보급》은 속편, 삼편을 포함해 모두 225책이나 되었다. 이것은 명청 두 조대 600년의 궁정소장에 대한 총결이다. 그리고 역대 제왕들이 소장한 최후의 규모이다. 전성시대의 청조 궁정 소장품은 약 1만점 이상이다. 그가운데 진당송원의 서화가 2천점, 명조의 서화가 2천점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 고전서화작품의 당시 최고규모였다.
고궁의 수많은 소장품가운데 제왕이 소장한 역대 명가의 작품 외에도 당시 궁정화가들이 창작한 회화작품도 있었다.
그림속에서 가슴과 다리를 드러내놓고 맨발에 물놀이를 하는 사람은 윤진이라고 하는데 그가 바로 청조 12명의 황제가운데 가장 부지런하다고 전해진 옹정황제이다.
아마도 바빠서 소일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인지 옹정황제는 특별히 궁정화가들에게 명해 지금의 모방쇼나 다름없는 이런 행락도를 그리게 했다. 이 행락도에서 윤진은 산속을 걷는 노인이기도 하고 원숭이와 장난을 치기도 하고 단정하게 앉아서 거문고를 타기도 하고 혼자 도롱이를 쓰고 낚시질을 하는 노인으로 변하기도 한다.
행락도 외에도 궁정회화에게는 더 중요한 임무가 있었는데 그것은 황제의 공로와 은덕, 업적을 기록하는 것이다. 청왕조 제왕의 정치업적은 이렇게 서화의 형식으로 기록되어왔다. 1911년에 민국정부가 건립되어서야 청왕조의 근 300년의 통지가 결속되었다. 궁정회화로 역사를 기록하던 방식도 이미 그 전부터 서방의 사진기술로 대체되었다.
사진속의 이 소년은 푸이라고 부르는데 그때 이미 폐위된 만청의 황제였다. 그러나 이 사진을 찍을 때 그는 자금성에 살고 있었다. 바로 이 소년이 후에 한차례 대규모의 절도행위를 저질렀는데 목표는 주로 당시 고궁에 보관해둔 진귀한 서화였다.
이 서화감상 날인은 푸이의 것이다. 날인의 문풍이나 양식은 건륭황제가 예전에 사용했던 것과 똑같다. 그것은 푸이가 퇴위한 뒤 장인들의 도움을 받아 건륭황제의 풍아를 빌어 새긴 한세트의 인장가운데 하나이다. 그 뒤 이 소년은 이 인장을 가지고 고궁의 옛 서화 소장품들에 대규모로 마구 날인했다. 그가 ‘어람’한 서화 1천여점이 그와 친동생 푸제의 손을 거쳐 몰래 궁밖으로 빼돌려졌다. 이 모든 것은 다 ‘하사’의 명의로 진행된 것이다. 고궁이 수백년동안 모은 서호작품의 진수를 10여세밖에 안되는 이 두 형제가 개미가 이사를 하듯 거의 다 훔쳐냈다. 1924년 푸이가 궁에서 쫓겨나서야 절도행위가 끝났다. 마지막 절도행위는 황실에서 출궁하는 그 날에 일어났다. 그러나 이번에 도적질을 한 것은 푸이가 아니었다.
[진윈창]
그 때 매우 계략이 있는 노부인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동치황제의 유비인 허서리씨로 경의황귀비라고 부릅니다. 이 노부인은 언제 어떤 기회를 탔는지 삼희당에 있는 《중추첩》과 《백원첩》을 몰래 자기가 거주하고 있는 수강궁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리고 1924년 출궁할 때 행장속에 넣어 친정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해설]
그 후 이 두 서첩은 여러 손을 거쳐 베이핑에서 가장 큰 소장가 곽보창에게 팔렸다. 10여년 후 새일대 소장가들이 궐기했다. 장백구는 새일대 가운데 유명한 애국 소장가이다. 그와 부인 반소는 국보의 유실을 막기 위해 가산을 탕진했다. 많은 국보들은 그들 부부가 후에 국가에 헌납한 것이다. 1935년, 그들은 곽보창에게 두 서첩을 사겠다고 했다.
[러우위둥]
그는 서첩 하나에 3천만 연페를 달라고 했는데 그것을 황금으로 계산하면 1천냥으로 《유춘도》보다 너 비쌌습니다. 《유춘도》는 800냥이었는데 그는 천냥에 서첩 하나를 달라고 했으니 당연히 불가능했지요. 그런 재력이 없었으니까요. 서첩 한점에 황금 천녕이니 서첩 두점에 황금 2천냥이 아닙니까? 2천냥 황금이라 당시 저의 장인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어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방 전, 두 서첩은 곽보창의 아들이 홍콩으로 가지고 갔다. 1951년 말, 저우총리의 특별 비준을 받아 이 두 서첩은 45만8천 홍콩달러에 구입됐다.
백년 세월의 풍파를 거쳐 삼희중의 이희가 곡절끝에 끝내 고궁으로 돌아왔다. 특정된 전시일에 이 곳을 찾은 관광객들은 건륭황제가 그토록 아끼던 이 두 서첩을 직접 볼 수 있다. 당시 푸이가 출궁할 때 계속 궁에 남아있던 《쾌설시청첩》은 항일전쟁 전 문물이 남으로 이전되면서 기타 문물과 함께 난징으로 갔고 1949년 에 또 타이완으로 옮겨졌다. 지금은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에 보존되어 있다.
삼희당 삼첩은 행운인 셈이다. 그것들처럼 이렇게 지금의 고궁에 보존된 서화, 난징박물원과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에 소장된 것들들 포함해서 모두가 역사적으로 보존되고 전승되어 온 서화문물의 극소수에 불과하다. 천재와 인재로 훼손되고 사라져 버린 고대 서화를 우리는 영원히 다시 볼수 없게 됐다. 그리고 일부분은 계속 역사의 흐름속에 흘러가고 있다. 보일 듯 말 듯…
이는 중국 박물관이 경매회사를 이용해 문물을 구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그림은 1945년 푸이가 장춘에서 잃어버린 뒤 다시 나타난 적 없다. 이번 경매에서 그것은 반세기이래 처음으로 나타나 중국 문물계를 놀래웠다. 고궁박물원의 구매가격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서화를 대량 소장한 이 옛 궁전은 현재 21세기의 절주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수조 때 화가 전자건의 이 《유춘도》는 베이징 고궁박물원에 보관되어 있는 연대가 가장 오랜 회화 진적이다. 우리에게 상상이 안 되는 것은 그것이 완성되어서부터 지금까지 1400년동안 이 얇고 취약한 견본화가 그렇게 많은 전쟁, 천재와 인재를 거쳤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현재 그것은 오랜 세월의 파란많은 역사적 운명을 마치고 요행히 살아남은 기타 고대 서화와 함께 한 오랜 민족 문명의 전승을 증명하고 있다.

출처:CCTV.co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북경 (5)자금성 (12)서안 (2)먹거리 (19)티벳 (6)내몽고 (4)아름다운중국 (6)오악 (7)기타 (9)
게시물 검색
금면왕조 金面王朝 GOLDEN MASK DYNASTY - 할인예약으로 알뜰여행 하세요!!
북경시 조양구 왕징 리와이리공위 3단원       北京市 朝阳区 望京 里外里公寓3单元      
공연장 주소 : 北京市 朝阳区 东四环北京欢乐谷 华侨城大剧院   중국 위챗 :
(주)포인트투어    서울시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605호    카톡 :    전화 : 02) 1234-1234    핸드폰 : 010-1234-1234   
차와 다과를 즐기면서 변검 쇼, 마술, 중국 전통악기 연주, 경극, 묘기, 만담 등 다양한 장르의 중국 전통문화를 한번에 감상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