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114
북경맛집
공항픽업
렌트카
가이드
회원가입
로그인
모바일버전
CCTV다큐동영상

[자금성] [다큐]고궁(06)-고궁에 수장된 도자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셀프차이나 작성일14-05-12 15:40 조회938회 댓글0건

본문

여기는 고궁박물원 동남 모퉁이에 위치한 남삼소이다.
전에 이곳은 자금성에서 황자들이 거주하며 공부하던 곳이었다.
고궁박물원 고기물부가 바로 여기서 업무를 보고 있다.
이 분은 겅바오창(耿宝昌)이라는 노인인데 이미 84세이다.
그는 이미 고궁에서 약 50년이나 일해왔다.
이 50년간 그의 매일 가장 중요한 업무는 바로 도자기를 연구하고 감정하며 만지는 것이다.
도자기는 창조에 능숙하고 미적 감각이 뛰어난 민족에게 특유한 것이었다.
도자기는 불의 강렬함과 물의 우아함 그리고 흙의 중후함을 갖고 있다.
중국인은 겉보기에 평범한 흙토에 물과 불의 작용을 가하고 중국인 마음과 사상의 승화를 거쳐 아름다운 그릇을 빚어냈다.
전에 도자기는 무측천이 불지사리를 공봉하는 최고의 기물이었다.
송휘종 궁정 정원에서 가장 우아한 장식이었다.
원세조가 동서방 무역을 진행함에 있어 귀중한 상품이었다.
영락 황제가 외국 사절에게 증정한 진귀한 선물이었다.
옹정 황제가 친히 창작과 설계에 참여한 예술품이었다.
중국 모든 백성의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물건이다.
더욱이 세계에서 가장 큰 궁전의 곳곳에 보존되어 있는 진귀한 보물이다.
도자기는 천년의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 자금성에서 인류의 공동한 문화유산으로 되었다.
현재 이 박물관에 수장된 150만점의 문물 가운데서 약 35만점이 도자기이다.
겅바오창 선생은 이런 도자기는 모두 친히 감정했던 것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연이 깊은 것은 높이가 두 치도 안 되는 작은 도자기잔이라고 소개했다.
이 도자기잔은 명성화두채 삼추잔으로 고궁박물원에서 가장 진귀한 수장품이다.
70년 전, 겅바오창 선생이 유리공장의 골등품가게에서 일을 배웠을 당시 이 도자지잔을 한번 본 적이 있었다.
이 한 세트 도자기잔의 첫 주인은 명나라를 통치한 성화 황제이다.
명성화 17년, 즉 1481년 일상 조정을 주재하던 대신들이 조정에서 황제를 본지 아주 오래되었다고 한다. 그때의 황제는 주견심으로 늘 가장 총애하는 만귀비와 후궁에서 향락만 누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7살 연상인 여자의 환심을 얻기 위해 성화 황제는 징더전 장인들에게 명을 내려 작고 깜찍한 술잔을 특별히 만들어 그녀에게 주려 했다.
암탉 무늬가 새겨진 것을 성화 투채계향배라고 부르는데 현재 세계적으로도 10여개 뿐이다.
나비, 난화, 풀 무늬가 새겨진 성화 투채삼추배는 더욱 진귀하다.
세계적으로 완벽하게 보존된 것이 한 세트밖에 없는데 현재 고궁박물원에 수장되어 있다.
이같은 작은 잔이 만들어지자마자 그때의 문인들에게 천하 술잔 가운데서의 최고의 진품이라 불렸다.
부드럽고 우아한 풍격은 고금에 둘도 없는 것이다.
이미 5백여년이 흘렀다.
성화 황제와 만귀비가 전에 놀던 이런 도자기 가운데서 일부는 여전히 이 궁전에 수장되어 있고 일부는 이미 세계의 서로 다른 곳에 흩어져 있다.
현재 고궁박물원에 수장된 35만점의 도자기 가운데서 대다수는 전에 이 궁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도자기는 궁전에서 생활한 다양한 연대 주인들과 많은 이야기를 그려냈다.
세월이 흐르면서 현재는 중국인들이 자랑거리로 여기는 경전 예술품으로 되었다.
이것은 부드러운 옥이다. 이것은 투명한 얼음이다. 이것은 산과 물 사이의 산뜻한 녹색이다.
중국 역대 문인아사가 이같은 도자기를 찬미하던 말이다. 바로 비색자이다.
현재는 고궁박물원에 수장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황궁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도자기였다.
수백년간 이런 도자기에 대한 신비로운 전설이 전해졌으며 도자기의 존재여부, 내력과 명칭에 대해서도 의론이 분분했다.
1987년, 13점의 비색자가 산시 파먼스 지하 궁전에서 출토되어서야 비로소 논쟁이 끝났다.
현재 세계에 현존하는 비색자 수량에 대해서는 고증한바가 없다.
고궁박물원이 새 중국 설립이후 3점의 수장품을 사들였다.
이같이 신비스런 도자기는 명청 두 조대 황제였을지라도 진짜 모습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건륭 황제가 전에 ‘당나라 월요자기 인간세상에 없고 조송 관요는 진성 보기와 같다네’라며 탄식한 적 있다.
중국 고대 역사에서 가장 희소하고 아름다운 물건은 늘 황실에서 독점하고 있었다.
명홍무 2년, 어요공장이 징더전에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이는 중국 역사에서 진정한 의미상의 첫 관요이다.
조정에서 관리하는 외 전국에서 최고의 장인을 모으고 최고의 자토를 이용해 황실에서 사용하는 도자기를 전문적으로 생산했다.
이런 도자기는 민간에서 사용하고 매매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구워 만드는 방법과 배합방법은 대외로 엄격하게 비밀에 부쳤다.
가난한 출신의 주원장은 관요를 설립하는 그 해에 절약하기 위해 하늘과 땅에 제사올릴 때 사용하는 예기를 도자기로 바꾸었다.
전의 예기는 금은기나 옥기로 만든 것이었다.
훗날 명성조 주체가 선두로 식사때 사용하는 옥그릇을 도자기그릇으로 바꾸었다.
부장품 그리고 해외 부속나라에 대한 장려도 도자기로 바꿨다.
이것은 고궁박물원에 수장된 명영락 청화압수배이다.
안쪽 밑부분에 ‘영락년제’라는 글이 씌여져 있다.
이것은 중국 관요 도자기에 처음으로 황제의 연관을 적은 것이다.
이때부터 새 황제가 황위에 오를 때마다 새롭게 구워만든 도자기에 자신의 연호를 썼다.
이 또한 중국 관요 도자기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황제가 제창하고 부추기면서 명나라 때 도자기를 굽고 만드는 수준이 한층 향상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때 징더전은 ‘장인이 사방에서 오고 도자기는 천하로 나가’는 양상을 이루며 중국 도자기제조업의 중심으로 발돋움했다.
징더전에 갔던 프랑스 전교사가 도자기를 제조하는 웅장한 장면을 ‘낮에 짙은 연기가 구름을 가로막아버리고 저녁에 가마의 불이 밤하늘을 붉게 물들였다’고 비유한 적 있다.
다 구운 도자기는 세계의 여러 문명지역으로 운송해갔다.
양저우, 광저우, 취안저우로부터 출발한 중국, 페르샤, 스페인과 훗날 영국의 선박은 도자기를 가득 싣고 인도, 아라비아 반도, 유럽, 지어 아프리카까지 운송해 갔다.
즉 이때 여기서 구운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최고 품질의 도자기는 모두 한 곳으로 운송해갔다. 바로 베이징 자금성이다.
이런 도자기는 그때 징더전에서 황궁으로 운송해간 명나라 관요 도자기이다.
현재 고궁박물원에는 황실만을 위해 구운 어제 도자기뿐만 아니라 원명시기 해외로 수출된 무역용 도자기도 수장되어 있다.
여기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청화자기이다.
백저남채의 도자기는 상큼하고도 산뜻했기에 훗날 사람들에 의해 인간세상의 진귀한 보물이라 불리우고 있다.
2005년 7월, 영국 크리트르스경매회에서 한 점의 원나라 때 청화자기가 2억 3천만 위안에 경매되면서 아시아 예술품경매의 최고가를 기록했다.
이것은 현재 고궁박물원에 수장되어 있는 원청화 큰 접시이다.
이것은 원청화 유리홍 투조개관이다.
이런 청화 유리홍은 단색의 청화보다 더욱 귀하고 희소하다.
중국 청화자기는 당나라 때 생기고 명나라 때 흥성하게 발전했다.
명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수량이나 품질에서 모두 절정에 이르렀다.
여기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고궁박물원에 수장된 영락 선덕 청화자기이다.
영선 청화는 정화가 서양으로부터 가져온 수입 청료를 사용했는데 소마리청이라 부른다.
이런 연료는 화려한 색깔을 만들어내는외 도자기 표면에 독특한 반점도 구워낼 수 있는데 중국 수묵화와 비슷한 운산효과를 나타낸다.
바로 이 시기의 청화자기는 찻잎, 비단과 함께 가장 환영받는 중국 상품으로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3대 주에 운송되었다.
원나라부터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대규모의 해외 운송과정에 얼마나 많은 중국 도자기를 운송하는 배가 대서양이나 인도양의 파도에 사라졌는지 이제 누구도 알지 못한다.
깊은 바다 밑에 대체 얼마나 많은 비밀이 숨어 있는지 매번 건져 올릴 때마다 격동스러운 발견이 뒤따라 뜻밖의 기쁨을 느끼게 된다.
도자기는 재질이 취약해 쉽게 파손됐으며 고온으로 굽는 과정에 생기는 복잡한 변화는 늘 예측하고 통제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중국의 옛 사람은 질좋은 도자기를 구워내려면 하늘이 내린 좋은 기회와 지리적 우세 그리고 뛰어난 공예가 전부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기형, 재질, 무늬와 색채가 모두 완벽한 정품은 장인들이 한평생 간절히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품이 여전히 오늘날까지 전해져 왔다.
이것이 바로 고궁박물원에 수장된 것인데 명나라 관요에서 가장 대표적인 도자기이다.
엄청난 인력과 물력을 들여 구운 관요의 도자기가 조그만한 흠집이 있어도 당장에서 깨뜨려 바로 그 자리에서 묻어버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기는 현재 징더전 명나라 어요공장 유적지이다.
우리는 그 연대에 땅속에 파묻힌 관요 청화자기 조각을 똑똑하게 볼 수 있었다.
자금성에서 깨진 도자기조각을 묻는 것은 환관들의 일상업무였다.
명청시기 황궁에서 사용하는 도자기는 파손되었을지라도 함부로 처리하면 안되고 반드시 전문적인 곳을 찾아 묻어야 했으며 깨진 도자기 한 조각이라도 궁 밖으로 유실되면 안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궁박물원이 설립된 후 여러 곳을 공사하면서 각 연대의 깨진 도자기 조각을 대량 발견했는데 위 기록을 정확하게 증명한 셈이다.
이것은 고궁박물원 북쪽 길에 위치한 북오소이다.
고궁박물원에서 파낸 깨진 도자기조각은 도자기전문가들이 고대 도자기를 연구하는데 있어 최고의 모델로 되고 있다.
도자기조각을 씻는 것도 고궁박물원 고기물부 도자기팀에서 늘 하는 주요업무이다.
겅바오창 고궁박물원 연구원
왜 글을 쓰지 않았냐면요? 강희 때에는 연관이 없었어요.
관요인지 민요인지 역사적으로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전에는 이런 것을 한마디로 외지화물이라고 했지요.
바로 외부로 수출하는 물건 즉 해외수출용 도자기이기 때문에 관요는 아닙니다.
누군가는 강희 본인이 황제의 연관 쓰기를 원하지 않았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도자기가 쉽게 깨지잖아요.
깨진다음에는 쓰레기처럼 버리지기 때문에 황제도 버려지는 것과 다름없다고 여겼대요.
그래서 강희는 존호를 쓰지 않았답니다.
황실의 물건에는 황제의 인장이 찍혀져 있다.
황제의 심미정서, 본성애호 그리고 정치적 포부는 서로 다른 시대의 도자기 제조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청나라 순치 열여덟해 정월 초이렛날, 8살난 강희 황제가 갓 황위에 올랐다.
궁중 사무를 전문 관리하던 사예 대환관 오량보가 효장 황태후의 살해명단에 올랐다.
명나라 때 설립된 환관 전권 십삼아문이 없어지고 내무부가 따로 설립되었다.
내무부는 황제가 친히 심복을 임명하여 궁내의 모든 사무를 관리하고 책임하도록 했다.
내무부 아래에 조반처를 내오고 궁정 모든 기물의 제조를 관리하게 했으며 그 아래에 여의관, 금옥작 등 수십개 부서를 내왔다.
도자기 생산은 내무부 총관이 직접 책임졌다.
강희부터 청나라 황제는 도자기제조에 온갖 심혈을 몰부었는데 전조의 군왕을 훨씬 초과했다.
하지만 강희가 중국 도자기에 대한 가장 큰 공헌은 세계에 둘도없는 법랑채색도자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때 프랑스 전교사가 동소태화 법랑을 공물로 바쳤는데 강희 황제가 한눈에 반했다.
그는 궁에서 제조해 보기로 하고 이같은 법랑공예를 자신이 좋아하는 도자기에 인용했다.
법랑채색도자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강희 황제는 조반처 아래에 전문적으로 법랑작을 내오기까지 했다.
자소태화 법랑제조방법은 다른 도자기를 만드는 것과 달랐다.
이 도자기는 유일하게 황궁에서 가마를 걸고 구운 어용 도자기이다.
도자기 소태를 징더전에서 구운 후 그 소태를 자금성에까지 운송해 갔다.
다음 궁내의 화가들이 무늬를 그리고 채색 물감을 입힌다음 궁에서 구웠다.
강희가 수시로 작업장에 들려 순시하고 감독하는데 편리하게 하기 위해 법랑채 굽는 가마를 양심전에 걸어놓았다.
한 점의 도자기에 대해서도 황제가 직접 의중을 전달하고 친히 둘러보며 황궁에서 구워 만들게 했는데 이는 중국 지어 세계에서도 전례 없는 것이다.
동소태화 법랑은 서양에서 온 것이라 강희는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외국 전교사를 끌어모았다.
지어 보는 전교사마다 그림을 그릴줄 아느냐고 물었다 한다.
만약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 전교사는 거의 강제적으로 궁으로 들어가 장인들과 함께 법랑채를 구워야 했다.
강희 56년의 3월, 이탈리아에서 온 전교사 마테오 리파가 유럽 동문들에게 전하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황제는 유럽의 법랑화를 아주 즐겼는데 유럽 화가들에게 법랑을 그리라 명했다.
우리는 온종일 비천한 장인들과 함께 일해야 했다. 그래서 법랑을 배운 적도 없다고 말하고 일부로 이 기술을 배우지 않았다.
우리가 그림을 엉망으로 그려야 황제는 어지를 내려 그만하라고 했다.
강희 황제의 직접적인 감독관리 아래 법랑채색도자기가 결국 강희가 세상을 뜨기 전에 성공적으로 구워졌다.
이 시기의 강희 법랑채는 동소태화 법랑과 풍격이 같았으며 무늬도 꽃이 주를 이룬데다 법랑 물감도 전부 외국의 수입에 의거해야 했다.
1723년, 옹정 황제가 황위에 올랐다.
아버지의 강산뿐만 아니라 강희 황제가 법랑채를 열애하는 마음도 그대로 물려 받았다.
하지만 옹정 6년 이전 법랑채색 도자기의 발전은 여전히 비교적 더뎠다.
강희부터 옹정 6년 이전까지 법랑채색도자기가 사용하는 법랑 물감은 여전히 서양으로부터 수입해야 했으며 색깔종류도 8~9가지뿐이었다.
옹정 황제가 황위가 오른 뒤 가장 믿던 열세번째 동생 윤상에게 내무부 조반처의 업무를 책임지게 하고 법랑채색도자기를 굽는 일에도 구체적으로 참여하게 했다.
옹정 6년에 이르러 국산 법랑 물감이 결국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색깔종류도 수입한 물감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법랑채색도자기의 혁신적인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옹정이 법랑채색도자기에 대해 아버지 강희보다도 더 열광적으로 추구했다.
바쁜 정무를 처리하는 외에도 늘 친히 도자기 양식을 설계하고 사용하는 물감, 회화 무늬 지어 기물의 높고낮음과 치수에 이르기까지도 하나하나 물어봤다.
옹정 6년 2월 17일, 옹정 황제가 여러 건의 국가대사를 처리했다.
오전에는 중화전과 보화전으로 항해 이튿날 올리는 농단제사의 준비를 검사했다.
그리고 양심전으로 돌아와 3개의 상소문을 읽고 2개의 어지를 내렸다.
이렇듯 바쁜 상황에서도 그는 법랑자기의 기형, 무늬, 재료에 대해 상세한 제시를 내렸다.
이것은 옹정시기의 법랑채색 도자기이다.
현재의 연구자는 이런 도자기들이 담백하고 상큼하며 심오한 아름다움이 담겨져 있다고 평가한다.
이런 것들은 강희시기의 풍격과 달랐으며 동소태 법랑채의 영향에서 기본상 벗어났다.
이 시기의 법랑채색도자기는 당시 저명한 궁정 화가에 명을 내려 직접 법랑 물감으로 흰자태에 그리도록 한 것이다.
이런 도자기에 중국 전통 문인이 숭상하는 매화, 난화, 대나무, 국화와 예술적 경지가 높은 산수화가 그려졌다.
중국 8천년간 지속 이어져 내려온 도자기 발전역사에서 법랑채색도자기는 중국 고대 도자기 전성기의 작품으로 중국 도자기제작의 최고 수준을 대표한다.
옹정은 장전불교를 신봉함과 아울러 도가문화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그는 천인합일을 숭상했으며 소박하고 자연적인 것을 추구했다.
그래서 옹정 황제는 조용하면서도 우아하고 소박한 풍격의 송나라 도자기를 가장 좋아했다.
옹정이 궁정 도자기에 대한 또 다른 공헌은 송나라 5대 명도자기에 대한 모방제조를 사상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옹정 8년 8월 초이렛날, 그는 문화전에서 강연했다.
바로 이날 그는 어요공장에 송나라 균요 도자기를 모방해 구울 것도 명했다.
이것이 바로 옹정이 모방해 만든 균요 고정세이다.
이것은 진정한 송 균요 고정세이다.
균요 도자기는 붉은 색과 남색이 서로 엇갈린 균홍유로 세상에 널리 이름을 알렸다.
민간에는 줄곧 ‘황금에는 값이 있지만 균에는 값을 매길 수 없다. 억만금이 있다한들 균자기 한점 가지고 있기보다 못하다’는 등 말이 전해지고 있다.
송휘종이 전에 꿈속에서 비오고 날이 개인 뒤 보인 하늘의 색깔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한다.
그래서 여요 장인들에게 자신의 요구에 따라 담청색의 도자기를 굽게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송나라 5대 명자기 가운데서 세상에 가장 적게 전해진 것이 바로 여자인데 세계적으로도 백점이 안 된다.
베이징 고궁박물원에 20점이 수장되어 있는 외 일부는 타이베이 고궁에, 일부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다.
명나라 ‘선덕정이보’에는 내무부에 시여관가균정 자기가 수장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서 훗날 사람들은 송나라 때 5대 명자기가 세상에 전해졌다는 것을 알아냈다.
자금성에 수장된 송나라 5대 명자기는 전에 송나라 황실에서만 사용된 진귀한 도자기이다.
가요유 표면은 자연적으로 갈라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대면적의 검은색 무늬와 소면적의 겨자색 무늬가 서로 얼켜 있는데 이를 금사철선이라 부른다.
관요 도자기는 분청유색이 가장 큰 특징이며 조형이 우아하고 소박하다.
정요는 송나라 5대 명요 가운데서 유일하게 백자기를 굽는 가마이다.
정요 도자기는 꽃을 새기고 찍는 장식을 중요시하는데 인화수준은 송나라 명요 가운데서 으뜸을 자랑한다.
이런 도자기는 현재 고궁에서 가장 진귀한 수장품이다. 이것은 중국 도자기제조역사에서 첫 역사적인 고조를 입증한다.
중국 도자기 공예수준은 청나라 강희, 옹정, 건륭시기에 새로운 절정에 이르렀다.
옹정의 아들 건륭이 황위에 오른 후 중국 봉건왕조의 마지막 태평성세를 누렸다.
바로 이때 도자기중심인 징더전의 인구는 백만명에 이르렀다.
황실 도자기를 만드는 어요공장 작업장만 23개에 달했다.
건륭 3년, 그는 궁정화가에게 ‘도야도책’을 그리라고 명했다.
이 도책은 어요공장의 생산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했으며 건륭 관요에서 개발한 새 기술도 담았다.
관요에서 도자기를 생산하는 20개 절차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하며 관요가 굽는 전반 절차를 규범화했다.
건륭은 제왕의 존귀한 신분으로 친히 도자기 생산을 지휘했다.
이는 건륭이 백성을 사랑하고 성실하게 정무를 보며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려는 정치이상을 드러내고 있다.
사신수원은 ‘도야도책’에 기록된 도자기생산에서 아주 중요한 한가지 절차이다.
이 절차에 대해서는 이런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명나라 만력 연간, 조정의 명에 따라 대용항을 구웠지만 번마다 실패했다.
기한이 곧 닥쳐왔기에 장인들은 벌을 받아야 할 판이었다.
이때 동빈이란 장인이 너무 걱정된 나머지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가마에 뛰어들었는데 결국 대용항을 구워냈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은 그를 기념하기 위해 대용항을 가마신으로 공봉했다.
그래서 번마다 도자기를 굽기 전에 향을 사르고 제사를 올리며 도자기를 성공적으로 구울수 있도록 보우해 주기를 빌었다고 한다.
‘도야도책’의 기록은 당영이란 독도관이 명에 따라 적은 것이다.
당영은 13살부터 양심전에서 잡역을 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는데 능할 뿐만 아니라 시나리오를 쓰는데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옹정 6년, 당영이 일을 노련하게 처리해 높이 평가받으면서 징더전 어요공장에 파견되어 가마 업무를 감독하고 독도관 연희요의 조수로 일하게 됐다.
그는 3년동안이나 모든 사회활동과 담을 쌓고는 장인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열심히 연구했다.
옹정 9년 때 그는 이미 문외한으로부터 뛰어난 재주를 갖춘 도자기업 전문가로 군림했다.
건륭 2년, 당영은 공식적으로 독도관이 되었다.
그가 도자기 관련 업무를 책임진 20여년간, 징더전에서 만든 도자기는 훗날 사람들이 공인하는 도자기 가운데서의 진품이다.
종류의 모방과 혁신 면에서나 기물의 제작기예 면에서 모두 전에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로 당영은 역사적으로 뛰어난 독도관으로 될 수 있었다.
이것은 고궁박물원에 수장된 건륭시기 당영이 감독해 구운 도자기이다.
건륭시기, 도자기생산의 관리가 더욱 엄격했다.
특히 독도관에 대한 요구가 아주 엄격했는데 오늘의 문책제와 흡사하다.
그때 당영과 같은 자일지라도 벌을 받아야 했다.
건륭 13년, 66세인 당영이 건륭 황제의 어지를 받았다.
‘이번에 당영이 진상한 도자기는 여전히 구식이구나. 왜 내려보낸 새 양식에 따라 만들어 진상하지 않는것이냐!
이번에 진상한 도자기를 구우면서 쓴 돈은 일절 정산해주지 않을 것이니 자네가 부담해야 할걸세.’
결국 이번에 467점의 도자기를 구우면서 사용된 비용을 전부 당영이 부담하게 됐다.
이것은 당영이 진상한 새 창작품인 분청유교태병이다.
‘교태’는 ‘역경’에 나오는 하늘과 땅이 화합한다는 말에서 얻은 것인데 즉 하늘과 땅이 서로 통합하고 운수가 형통다는 뜻이 담겨있다.
상하 두 부분으로 나뉘고 서로 고리처럼 걸려있어 움직일 수는 있지만 분리시킬 수는 없다.
분청유교태병은 베이징 고궁박물원에 보존되어 있다.
이 도자기는 당영이 구운 분채팔괘여의전심교태병인데 현재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에 수장되어 있다.
이것은 건륭 분채투조전심병이다.
이 전심병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병 자체를 제외하고 기타 부분은 모두 움직일 수 있다.
특히 경부에서 움직이는 부분은 병과 천간지지의 만년력을 구성함으로써 아름다우면서도 실용적이다.
건륭이 도자기에 대한 관심을 보면 다른 문화사업을 관심하는 것처럼 비범하면서도 현재 수준이상의 것을 혁신하려는 이념이 강했다.
건륭 황제의 세심한 참여와 독도관의 노력으로 건륭 관요에서 많은 혁신적인 작품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징더전 어요공장에서 건륭 황제를 위해 구운 도자기인데 중국 도자기역사에서 둘도없는 작품이다.
이것은 높이가 87센티미터에 달하는 큰 도자기병인데 도자기의 어머니라 불리운다.
총 15가지 유채, 16가지 무늬 장식이 있는 외에도 12폭의 길상무늬가 그려져 있다.
전에 역조역대에서 구워내지 못한 이토록 크고 공예가 복잡한 정교한 기물을 만들어낸 것은 건륭 황제가 자신을 ‘10가지가 완벽한 노인’이란 평가하는 원인중 하나이다.
건륭이 최고의 작품을 소유하고 있을 때 그가 통치하는 이 제국은 한창 중국 역사에서 문화와 예술의 절정을 창조하고 있었다.
그가 소유한 강토는 그토록 넓었으며 이 땅에서 생활하는 민족은 또 그토록 다채로울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후의 50년간, 이 왕조는 전에없는 곤경과 재난속에 빠졌다.
그의 자손들은 천조대국의 안정과 부강을 더는 누리지 못했다.
한 왕조의 멸망이 빠르게 도래했다.
그후부터 중국 궁정 어제 도자기도 갈수록 내리막길을 걸었다.
선통 3년에 이르러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관요의 생산도 역사로 되고 말았다.
자금성에서 소유하고 있는 천년의 역사를 지닌 도자기 보물도 역사의 동란속에 분산되기 시작했다.
청나라 말기부터 궁궐에 수장되어 있던 많은 도자기 진품이 점차 유실되기 시작했다.
전쟁 그리고 험난을 여정을 거쳐 국내, 국외로 나돌기 시작하면서 인간과 물건사이에 정감과 인연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성화 두태삼추배가 궁정에서 민간에 유실된 후 겅바오창이 처음 본 것도 1930년대 난세의 가을이었다.
20년 후, 겅바오창가 세상에 드문 삼추배와 다시 만났다.
다시 말해 이 시기, 고궁박물원의 도자기 수장이 새로운 한 폐이지를 펼치기 시작했다.
새 중국 설립된 후 선후로 2만 여점의 도자기가 육속 고궁박물원에 수장되었다.
2005년 9월 26일,  침몰한 스웨덴 예테보리호 상선에서 건져낸 다수의 중국 수출용 도자기가 고궁박물원 오문 성루 전시홀에서 전시되었다.
전시가 끝나면 이중 몇 점은 영원히 고궁에 수장되어 고궁박물원 35만 점 수장 도자기 가운데의 새 성원으로 된다.

출처:CCTV.co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북경 (5)자금성 (12)서안 (2)먹거리 (19)티벳 (6)내몽고 (4)아름다운중국 (6)오악 (7)기타 (9)
게시물 검색
금면왕조 金面王朝 GOLDEN MASK DYNASTY - 할인예약으로 알뜰여행 하세요!!
북경시 조양구 왕징 리와이리공위 3단원       北京市 朝阳区 望京 里外里公寓3单元      
공연장 주소 : 北京市 朝阳区 东四环北京欢乐谷 华侨城大剧院   중국 위챗 :
(주)포인트투어    서울시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605호    카톡 :    전화 : 02) 1234-1234    핸드폰 : 010-1234-1234   
차와 다과를 즐기면서 변검 쇼, 마술, 중국 전통악기 연주, 경극, 묘기, 만담 등 다양한 장르의 중국 전통문화를 한번에 감상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