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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다큐]고궁(01) - 자금성을 건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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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셀프차이나 작성일14-05-09 21:05 조회679회 댓글0건

본문

1403년 1월 23일은 중국 음력 계미년 1월 1일이다.
이날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예로부터 전해져 온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들은 1년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명절인 음력설을 맞이했다.
이날 사람들이 받게 되는 오늘의 연화장과 비슷한 선물에 더는 건문의 연호가 없다.
건문제 4년의 통치가 정난지변을 거쳐 이제는 옛 일로 되었기 때문이다.
1403년의 음력 초하루, 명나라 세번째 황제인 주체가 영락을 연호로 공식 사용했다.
이 해를 영락 원년이라 한다. 연호의 교체로 이 왕조는 더 많은 변화가 뒤따르게 된다.
영락 원년, 명나라의 도읍은 오늘의 중국 난징이었다.
앞서 6개 조대의 옛 도읍으로서 동한시대부터 이미 왕자의 기가 흐르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명태조 주원장이 도읍을 이곳으로 정했으며 중국 2천년 궁전 건축의 정수를 모아 황실 궁전을 건축했다.
현재 이 궁전에 일부 유적만 남았지만 그때의 기백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하지만 그때 베이징성은 명나라 판도에서 그저 조정의 보정사에 해당되었으며 베이핑이라 불렀다.
이곳은 인적이 드물다. 주체가 11살 때 연왕으로 봉해졌고 그와 옛 부하들은 이곳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대한 감정이 남달랐다.
영락 원년의 음력 정월 초사흩날, 주체가 선조 때부터의 제도에 따라 하늘과 땅에 제사를 올리고 황궁으로 돌아갔다.
군신이 모인 자리에서 이지강이란 예부 상서가 이런 건의를 올렸다.
그는 베이핑이 하늘의 명을 받들어 황실을 흥하게 하는 곳이기 때문에 태조 고황제를 본 받아 다른 도성을 내오는 제도를 내와 베이핑을 도읍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락 황제는 그 말을 듣고 아주 기뻐하며 곧바로 승낙했다.
몇 시간내에 베이핑이 베이징으로 신분이 상승되고 왕조가 두번째 도읍을 내온다는 소식을 성지로 내려 천하에 알렸다.
이 소식은 전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한 채의 위대한 궁전도 이로부터 탄생되었다.
(하늘은 백성을 아끼고 함부러 대하지 않는 품행이 있거늘.
군주 역시 하늘의 이런 품행을 본받아 백성을 아끼는 것을 근본으로 해야 하거늘.
천하가 크니 혼자의 힘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리라.
반드시 능력있는 인재를 임명하여 함께 통치하고 각자의 능력을 발휘해야만 백성을 위해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으니라)
갓 보좌에 오른 영락 황제는 이런 내용의 성지로 천하를 다스리는 이념을 알렸다.
현재 볼 수 있는 사료를 통해 1403년 주체가 애매하고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지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조카에게서 황권을 빼앗아 갓 보좌에 오른 황제인 그의 앞에 처리하기 어려운 일들이 문제들이 많았다.
더욱이 그를 반대하는 건문제의 옛 부하들을 계속 죽이고 있었으니.
많은 사람을 죽이고 난 주체는 불안해졌다.
그도 앞서 주변의 여상이란 대신에게 이렇게 하면 천지 선조에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본 적도 있다.
더욱 그를 불안하게 한 것은 난징성을 공격할 때 조카 건문제가 한 차례의 큰 불이 나면서 신비스럽게 실종되어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천자의 예의에 따라 조카에게 성대한 장례를 치러주었다.
하지만 훗날의 많은 역사학자들은 그때 하장된 자가 건문제 본인이 아니며 건문제는 밖으로 도망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주체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그 뒤로 어느 하루 조정에 나갔다가 주체는 하마트면 경청 어사대부에게 암살당할뻔 했다.
이 일이 있는 후부터 주체는 난징성에서 늘 악몽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그가 더욱 애타게 고향 베이징을 그리워했을 지도 모른다.
난징 황궁의 유적을 통해 북방에서 다년간 생활했던 영락 황제가 난징에서 생활하는 것을 갈 수록 더 싫어했다는 것을 가히 상상할 수 있다.
그는 첫 도읍을 베이징으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그해 5월, 조정에 나갔을 때 그는 대신들에게 베이징이 그제날의 봉국이였고 국사와 국직이 있기 때문에 나라의 도읍으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황제의 건의를 대신들이 강하게 반대했다. 그후부터 주체는 더욱 소심해졌다.
그는 우회적이고 비밀적인 방식으로 도읍을 옮기기 위해 계통적이고 치밀하게 준비했다.
1403년, 베이핑에서 갓 베이징으로 이름을 바꾼 도시에 갑자기 장쑤, 저장 등 일대에서 온 남방인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조정의 허락을 받고 베이징으로 갈 경우 5년간의 세수를 감면하는 특혜를 누릴 수 있다.
이런 자들은 대부분 부유했으며 베이징에서도 인차 예전에 남방에서 했던 장사를 다시 했다.
아울러 베이징 교외에는 황무지를 개간하고 곡식을 심는 농민이 많아졌으며 대규모의 이민붐이 일기 시작했다.
호호탕탕한 이민대오가 베이징으로 몰려 들어올 때 베이징과 만리 떨어진 서북 초원에서 몽골 첩목아대한이 정예기병을 인솔하고 이미 중원을 향해 압박했다. 명나라 북방에 또 위협이 닥쳤다.
영락 황제가 전쟁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던 찰나 첩목아가 갑자기 행군과정에 병으로 사망했다. 이 때문에 한 차례의 큰 전쟁도 따라서 피면할 수 있었다.
1405년 6월, 동남풍이 불 때 정하가 영락 황제가 파견한 함대를 이끌고 원양항해를 떠났다.
그는 영락 황제가 세계에 명나라의 위력을 알리는 사명을 짊어지고 망망한 바다로 향했다.
이번 항행은 실종된 건문제를 찾기 위해서라고 전해지고 있다.
1406년 8월, 정하가 인솔한 함대가 호호탕탕하게 항행하고 있을 때 난징 황궁에 주체가 기뻐할만한 일이 일어났다.
영락 황제가 비밀리에 의중을 전한 것인지 대신들이 생각해낸 결과인지는 이제 고증할 방법이 없다.
이날 조정에서 구복을 위수로 한 대신들이 베이징에 새로운 한 채의 궁전을 지을 것을 건의했다. 영락 황제는 기꺼이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로부터 방대한 규모의 공사가 서막을 열었다.
영락 황제는 심복과 측근을 전국 각지로 파견해 이 방대한 규모의 공사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들 가운데는 송례 공부상서, 사규 사부 우시랑, 고박 호부 좌시랑이 있었다.
이들이 곧 가게 될 곳은 쓰촨, 후베이, 후난, 광둥 등 지역의 군산준령이다. 그들은 이번에 녹나무를 채벌해야 한다.
진귀한 녹나무는 주로 원시 사람의 험준한 곳에서 자라는데 거기에는 호랑이, 표범, 뱀, 이무기가 자주 출몰한다.
관리와 백성들이 목숨 걸고 산으로 채목하러 갔다가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후세인들은 ‘산에 천명이 들어갔다가 오백명이 나온다’로 채목의 대가를 묘사했다.
여기는 오늘날 자금성 태화전의 실내 모습이다. 그때 벌목한 녹나무는 바로 이런 기둥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영락시기의 거대한 녹나무는 태화전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이런 커다란 기둥은 훗날 청나라 때 송목으로 합쳐 만든 것이다.
이는 2004년 6월, 고궁을 전면적으로 수리하면서 진행된 한 차례의 나무운송 공정이다.
거대한 목자재를 현대의 운송도구로 고궁으로 운송해 가는 것도 사실 방대하고 번잡하며 간고한 업무였다.
그럼 5백년 전, 이런 목자재보다 수 십배 많은 녹나무를 어떻게 자금성에 까지 운송해 갔을까?
쓰촨으로 파견된 송례 공부 상서는 황제에게 나무를 채벌해 운송해 가는 전기적인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어느 한번 산사태가 일어나 한 그루의 큰 나무가 떠밀려 내려갔다.
거대한 돌이 앞길을 가로막자 큰 나무는 천둥을 치는 듯한 소리를 내며 큰 돌을 향해 세차게 부딪쳤다.
큰 돌이 갈려졌지만 큰 나무는 그대로였다.
그후 영락 황제는 이런 이야기가 일어난 그 산을 신목산이라 이름을 지었다.
이는 특수한 사례이다. 더 많은 목재는 쓰촨, 구이저우, 후베이 숭산준령 속의 천연적인 하천과 건설한 운하를 거쳐 베이징으로 운송해 갔다.
영락시기 새 궁전을 짓기 위해 장장 13년이나 나무를 채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궁전을 짓는데 사용할 석재를 채굴하는 일도 아주 어려웠다고 한다.
우리는 보화전 뒤쪽에서 고궁에서 가장 큰 단폐석을 발견했다.
명나라 때, 옹근 하나의 돌을 조각해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큰 돌을 어떻게 이곳까지 운송해 왔을까?
이런 돌은 전부 베이징 서남 교외 쟈오팡산의 따쓰워와 먼터우거우의 칭하이커우에서 운송해온 것으로 역사 사료에 기재되어 있다.
명청 두 조대로부터 6백년을 뛰어넘어 현재까지도 한백옥석을 생산하고 있다.
우리는 결국 명나라 사료에서 보화전 뒤쪽에 있는 그 석재의 채굴과 운송과정을 발견했다.
이 돌을 채굴하기 위해 1만 여명의 민공과 6천 여명의 병사를 동원했으며 베이징으로 운송해 오는 과정은 더 말할 나위없이 간고했다.
수 만명에 이르는 민공들이 석재를 운송하는 도로 양켠에 길을 수리하며 구멍을 메꿨다.
한 리의 간격으로 우물을 파곤 했는데 물방울도 얼음이 되어버리는 엄동설한에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밖으로 뿌리며 수로를 만들었다.
2만명의 민공과 천 여마리의 노새가 장장 28일을 거쳐 베이징에까지 운송해 갈 수 있었다.
간난신고를 겪으며 자금성에까지 운송해간 큰 돌을 대부분 고궁의 중축선인 어도에 놓았다.
현재의 전문가, 학자들은 궁전을 짓기 위해 약 10년 동안이나 재료를 준비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10년간, 베이징은 점차 명나라 강역 내에서 가장 흥성하고 방대한 건축 공사장으로 되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3D로 재현한 것인데 그때 자금성을 건설할 때 베이징 공사장의 모습이다. 그때 생겨난 유명한 공사장 명칭도 현재까지 줄곧 보존되어 왔다.
이토록 방대한 공정이었지만 역사에 기재된 자는 극히 적었다.
그때 궁전을 짓기 위해 신근하게 노동한 장인이 백만명을 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 중에는 산시로부터 온 왕순, 호량 장인 같은 행운자도 있었다.
어느 하루, 영락 황제가 공사장을 둘러보다가 그들의 채색화를 보았다 한다.
황제는 왕순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진녕후 진규가 1406년에 베이징성 및 궁전을 개조건설하는데 총지휘로 임명되었다.
영락 황제가 진규에게 보내는 조서에 이렇게 적었다.
“공사장의 군인과 민공을 너그럽게 대해주게. 식사와 휴식은 규칙이 있어야 하고 너무 힘들게 일하지 말아야 하네. 너희들은 내가 백성을 아끼는 마음을 알아줘야 하느리라.”
진규는 줄곧 베이징에서 현장 감독으로 일하다가 1419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자금성이 낙성하는 날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이번 공정에 참여한 숙련공 가운데서 노목공 김형을 위수로 한 20여명이 영선소승으로 동시에 승진 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외 일부 유명한 사람들, 예를 들어 석재제작을 책임졌던 육상, 공예를 책임졌던 채신도 역사에 기재되었다.
이곳은 오늘날 베이징의 중난하이이다.
6백여년 전, 자금성이 아직 채 건축되지 않았을 때 주체의 연왕부와 자금성이 완공되기 전에 임시로 사용한 궁전이 바로 이 구역의 서북쪽에 위치해 있다.
1409년, 주체는 순수의 신분으로 이곳에서 살았다.
1409년부터 궁전이 건축되기 까지의 1421년, 그는 베이징에서 5년 8개월을 지냈다.
이 때문에 명나라의 결책, 군사와 행정 시스템이 점차 북쪽으로 이전될 수 있었다.
주체를 따라 베이징에 온 화가 왕불은 이 시기에 ‘연경팔경도’를 창작했는데 시밀한 화법으로 그 시기 베이징의 아름다운 풍경과 풍정을 담아냈다.
그때, 베이징은 갈 수록 번창해졌다. 이민을 온 군호들은 교외에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땅을 일궜기 때문에 베이징 농업생산 수준이 빠르게 향상되었다.
베이징은 이 왕조에 더욱더 중요한 역할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1410년부터 1414년까지 주체는 베이징을 근거지로 두 차례나 장성을 넘어 친히 정벌에 나섰으며 오래 동안 베이징을 위협하던 몽골부락을 격퇴했다. 승리를 거두고 그는 인솔한 방대한 군대를 검열했다.
주체가 도읍을 베이징으로 옮기는 계획을 실시하자마자 가장 친밀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바로 서 황후이다.
그들의 혼사는 주원장이 직접 중매를 선 것이다.
본처를 어떻게 안장해야 할까?
도리대로라면 능묘를 난징에 안쳐야 했지만 주체는 대신과 풍수선생을 비밀리에 파견하여 베이징에서 길한 땅을 찾아 능묘를 짓도록 했다.
2년 후, 주체는 어지를 내려 창핑 이북 20여리 되는 곳을 능묘구 금지구역으로 명했다.
이곳이 바로 현재의 명13릉이다. 서 황후의 죽음을 빌어 지은 능묘를 통해 대신들은 황제가 도읍을 옮길 신호를 알려주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후부터 난징성의 일부 대신들은 상서하여 영락 황제가 비밀리에 도읍을 옮기려는 의도를 정면적으로 반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체는 허난 보정사 주문보, 왕문진 그리고 참의 진조적을 일반 농민 신분으로 농촌에 유방시켰다.
이 때문에 다른 자들도 침묵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1416년 11월의 어느 하루, 주체가 갑자기 문무군신을 모아놓고 상냥하게 베이징이라는 민감한 이야기를 꺼냈다.
황제는 베이징 궁전의 건축에 보통 때와는 전혀 다르게 민주를 주장했다.
하지만 이번에 대신들이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금성을 하루 빨리 착공해 건축하는 일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을 뿐만 아니라 베이징의 우월한 지리적 위치를 높이 평가하며 명나라의 첫 도읍을 베이징으로 정하자고 강하게 요구했다.
그들은 “베이징이 북쪽으로는 쥐융관, 남쪽으로 타이항산과 잇닿아 있고 동쪽으로는 산하이관과 연결되어 있으며 남쪽으로는 중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드넓은 옥야가 펼쳐져 있고 산과 하천이 웅장하고 아름답습니다. 사방을 통제하고 천하를 통치할 수 있으니 만세를 이어갈 제왕의 도읍이 맞습니다.”
주체가 몇 년간 모진 애를 쓰며 계획하던 도읍 이전 욕망이 삽시간에 군주와 신하 모두가 바라는 일로 되어 버렸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중국 정치중심이 북쪽으로 이동하고 중국 지원정치가 이로부터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변화로 하여 중국 수 백년의 정치국면 나아가 현재까지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한다.
2005년 4월 10일의 이른 새벽이다. 고궁 박물원의 궁정 성벽 내에 많은 노동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서 공정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바로 궁전에 대해 한 차례의 대규모적인 복구를 하는 것이었는데 이번 복구는 19년이 걸릴길것으로 예상됐다.
약 600년 전, 똑같이 이곳에 10만명의 장인이 모여서 궁전을 복구한 적 있다. 그들중 대다수가 허난, 산둥, 산시, 안후이 등 지역에서 왔다.
현재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이 궁전을 지었는 지 알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그들이 겪었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도 알 수 없다.
궁전을 건축한데 대해 공식적으로 기록한 ‘명실록’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계해, 처음 베이징을 건설함에 있어 종묘와 사직, 궁전, 문궐, 규정은 난징을 본따야 하며 지나치게 웅장하고 아름다워서는 안된다’ 1419년, 이 궁전에 대한 건축은 문자로만 기록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운 좋게 카메라로 이런 영상을 담을 수 있다.
복구 장면을 통해 우리는 그때 궁전을 건축하던 일부 흔적을 조금은 잡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나니 역사의 기록에 대해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명실록’에서 ‘영락 15년 6월부터 공사를 시작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현재 일부 연구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자금성이 영락 15년부터 3년 반의 시간을 들여 건축되었다고 단정한다.
반면, 일부 학자들은 8천여 개의 방이 있는 이토록 방대한 규모의 공사를 오늘날이라 할지라도 3년 반의 시간에 건축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어떠한 논쟁이 있었을지라도 오랜 세월동안 중국 고전건축의 공사기술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나무작업 기와작업 돌작업 미장작업 흙작업 도장작업 도포작업 도배작업
자금성이 건축된 지 6백여년의 시간이 흐른긴 했지만 현재의 건축기술자들이 사용하는 건축방법은 여전히 그때의 기술을 이어오고 있다.
이런 전통적인 공예는 청나라 때 팔대작으로 요약되었다. 즉 나무작업, 기와작업, 돌작업, 미장작업, 흙작업, 도장작업, 도포작업, 도배작업 등이다.
우리가 오늘 앵글에서 보게 되는 기술은 이번 대보수에 사용되는 것인데 이는 6백여년 전 명나라 때 기술자들이 운용했던 수법과 거의 흡사한 것이다.
1420년, 궁전이 드디어 완료되었다.
그것은 원나라 도읍 황궁의 유적지에 탄생되었다.
원나라 도읍에서 일찍 널리 이름을 알렸던 연춘각은 경산에 의해 대체되었으며 전체 궁전의 건축물들이 북에서 남을 향하여 뻗어 베이징의 중심지대에 자리함으로써 이 왕조의 새로운 성지로 되었다.
이곳의 벽돌, 기와, 그리고 목석, 이곳의 채색, 이곳의 공간배치는 모두 중국인의 오래전 문명의지와 이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때부터 이곳에서 24명의 황제와 수많은 왕비, 황태자들의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인생을 지내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중국 역사에서 수많은 아름다운 순간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1421년, 궁전이 막 건설된 후 백성들이 그해의 음력 정월 초하루를 맞이했다.
이날 주체는 새로 낙성된 궁전에서 방대한 규모의 축하 의식을 거행했다.
그가 넓고 웅대한 봉천전에 올라서서 대신들의 절을 받았다.
주체와 대신들은 비할 데 없이 찬란한 궁전에 의해 사기가 진작되고 고무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봄이 왔다.
평생 베이징에서 복역한 기술자, 민부와 군인들, 지어 감옥에 갇힌 죄인들에까지 황제는 조세를 줄이고 병역을 면제해주며 천하를 사면해준다는 조서를 내려 그들의 운명을 바꿔주었다.
궁전을 다 짓자 아주 만족한 영락 황제는 미래를 점치는 호씨 성을 가진 관원을 찾아서 이후에 어떠한 일이 생길 것인지를 점쳐보게 했다.
호씨는 “내년 4월 초 여드렛날 궁전에 화재가 발생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영락제는 크게 노하여 그를 감옥에 가둬버렸으며 만약 그때 불이 나지 않으면 네 목을 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느 누구도 이 사람의 말을 마음에 두지 않고 모두 새로운 궁전이 완공된 기쁨에 빠져 있었다.
바로 이때 영락제는 정화을 파견하여 6번째로 함대를 인솔하여 서양으로 항행하도록 명했다.
1421년 5월 9일에 갑자기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울렸다.
3대 궁전에 갑자기 큰 불이 일어났는데 그대로 번갯불에 적중되었다.
주체가 과연 관원을 찾아 새 궁전의 미래를 점쳤던 것인가는 역사적으로 고증할 수 없지만 그 호씨 성의 관원이 예측한 일은 전설로 확정지을 수는 있다.
‘명사’에서는 이번 화재에 대해 정확하게 ‘4월 경자, 봉천 화개 근신 3대 궁전에 화재가 일어났다’라고 기록했을 뿐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았다.
3대 궁전이 화재로 파괴되자 영락 황제 주체가 어쩔 수 없이 봉천문에서 정무를 처리했다
영락제가 약 20년 동안 대량의 인력과 물자, 자금을 동원하여 건설한 3대 궁전은 단지 3개월만 존재하고 천화에 파괴당했다.
주체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궁전의 훼손에 애석해 하는 것도 있겠지만 더욱 그를 괴롭힌 것은 자신에 대한 의심이었다.
주체는 문무군신에게 이런 내용이 담긴 조서를 발표했다.
‘봉천 등 3대 궁전을 화재로 잃어 내 마음이 심히 두렵고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만약 내가 정말 잘못한 곳이 있다면 모두들 필히 속마음을 털어놓게. 나에게 잘못을 바로잡고 하늘의 뜻에 따를 기회를 주게나.” 라고 말했다.
지혜를 구하는 조서가 하달되자 관원들 가운데서 격렬한 반향을 일으켰다.
일부 사람들은 이 기회를 빌어 주체가 큰 것과 공 세우기를 좋아한다고 질책하는가 하면 그가 베이징으로 도읍을 옮긴 것 자체가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두려움과 격노의 모순 속에서 갈팡질팡하던 영락제는 대신들이 오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서로 변론하게 했으며 그를 비난한 한 관원을 사형에 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체가 온갖 힘을 동원해 변방의 우환을 없애기 위해 여섯번째로 몽골 북벌원정에 나섰다.
하지만 그의 건강이 갈 수록 나빠졌으며 말등에서 일생을 지낸 그가 결국 말 위에서 떨어져 몽골 북벌원정 중에 유목천에서 생명의 끝을 맞이했다.
화재에 의해 훼손된 명나라 3대 궁전은 영락시대에 재건작업이 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후 20년 동안이나 꿈처럼 휘황찬란했던 자금성의 중앙지역이 새까만 폐허상태를 유지했다.
어느덧 10여 년이 지나갔다. 전통 원년인 1436년, 명 영종 주기진이 보좌에 올랐다.
겨우 7살인 아이는 증조부인 주체를 무척 존경했다.
그가 황위에 오르자마자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하지 못했던 일을 했다. 바로 자금성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해 가을에 주지진은 “환관 완안, 도독동지 심청, 소보공부 상서 오중이 군인과 민부 수만명을 이끌고 도읍 구문 성루를 재건할 것을 명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또 5년이 지난 후, 그는 공식적으로 조서를 내려 3대 궁전과 건청, 곤녕 두 궁을 재건했다.
조서를 내린 날부터 바로 공사에 들어갔다.
일년 반 후에 십 몇년동안 미뤄졌던 재건 공사가 완료되었다
모든 것이 잘 마무리되었다. 자금성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으며 천하에 알리는 성지가 내려졌다.
베이징 자금성은 마침내 중국 명, 청 두 조대가 천하를 통치하는 최고의 정치중심으로, 세계 건축예술사에서 유일무이한 최고의 작품으로 되었다.
이때부터 당당하게 세계에 웅장함을 뽐냈으며 인류 역사상 지금까지 볼 수 있는 가장 큰 궁전 건축군으로 더 나아가 전 인류의 공동한 역사문화 유산으로 되었다.
자금성이 재건된 이후 또 수백년간의 기간동안 수차의 재난을 겪고 재건을 거쳤으나 자금성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출처:CC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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