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114
여행견적
회원가입
로그인
모바일버전
CCTV다큐동영상

[기타] 영화황제 김염(金焰)을 추억하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셀프차이나 작성일17-11-11 10:53 조회331회 댓글0건

본문

중국영화는 1905년 시작해서 지금까지 110년을 넘겼습니다. 현대 중국영화는 멋진 컬러의 향연을 보여주지요. 

그런데 1930년대 상하이에서 가장 화려한 꽃을 피웠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중국 영화팬들이 뽑은 영화황제는 바로 조선인 김염(金焰)이었습니다. 

지금도 중국 영화에서 황제라 하면 김염입니다.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한국의 서양의사 1호인 김필순의 셋째 아들입니다.

김필순의 가계 역시 독립운동가의 가문이랄 정도로 많았습니다. 독립유공자만 여섯,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고 .......


김필순은 1919년 헤이룽장성 치치하얼이라는 아주 먼 북만주 황무지에 조선인 이상촌을 건설하다가 일본 밀정에 의해 독살됐습니다.

당시의 서양 의사는 수입이 좋았습니다. 그 돈은 전부 독립운동 자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니 김염의 부친 김필순이 독살되고나서보니 그의 가족은 빈털털이에 가까왔습니다.

이런 게 독립운동가의 가족이란 운명이었습니다.


김필순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김염은 상하이 고모댁으로 보내졌다가 톈진으로 가출했다가, 다시 상하이로 가출했습니다.

고단한 생활과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벌어진 일입니다. 이때가 겨우 열입곱 살.



김염, 장동건 이민호를 합친 준수함이 빛나지요?




그는 상하이 영화판의 밑바닥을 혹독하게 기었지만 결국 20세 초반에 영화스타로 발돋움했습니다.

김염은 당시 젊은이들의 감각과 사상과 유행을 선도했습니다.

1934년 상하이에서 독자들 상대로 설문조사를 해서 그에게는 <영화황제>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였지요.


일생에 걸쳐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두 번의 결혼 모두 당시 중국 영화계의 스타 여배우였습니다.

첫번째 부인은 왕런메이(王人美)로 신인배우 시절 결혼했고, 최고의 배우로 성장했습니다.


그렇다고 김염의 생활이 스캔달 속에서 어지러웠느냐,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김염은 운동이 취미인 건실한 청년이었지요.

영화계 인사들 가운데 운동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미명(未明)이란 이름의 농구팀을 만들 정도였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조국 조선과, 영화배우의 삶과 결혼을 통해 새로 얻은 조국 중국, 두 개의 조국을 갖고 살았습니다.

이것도 독립운동가의 아들이라는 운명에서 비롯된 드라마틱한 결과의 하나입니다.



김염은 청춘영화로 출세했지만 그의 스승 텐한을 징검다리로 해서 현실참여의 영화로 전환합니다.

그의 영화는 계속 대중적으로도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친일색채가 농후한 국민당 정부의 온갖 영화검열 속에 압박을 당합니다.


국민당 정부의 탄압? 김염의 영화가 항일 투쟁의 뜻을 담은 영화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침략을 그린 영화가 국민당 정부의 검열 끝에 

일본군은 비적으로, 만주은 어딘지 알 수 없는 변방으로, 시대도 1930년대가 1920년대로 바뀔 정도였습니다.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이런 정도로 친일인지 잘 모르는 분들이 많지요? 

장제스는 일본이 침략하면 잽싸게 군대를 철수해주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친일 정치가였습니다. 

항일투쟁을 하자고 하는 중국 대학생의 시위에 발포를 할 정도였지요.


적지 않은 상하이 영화인들이 1936년 37년에 중국 공산당이 새로 자리 잡은 옌안으로 갔습니다.  

김염도 엔안으로 갈까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으나 그는 상하이에 남았습니다.


그러다다 ...... 결국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상하이를 일본에게 내주고 말았습니다.

1937년 일본이 상하이를 점령하자 상하이의 각국의 조계조차 일본의 세상이 됐습니다. 


그는 일본이 상하이에서 제작하는 영화에 출연하라고 강한 압박을 받았습니다.

김염은 이를 단호하게, 그것도 여러 차례 거절했습니다. 일본군 장성과도 대면해서 직접 언쟁까지 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김염은 신상의 위협이 심각하게 다가오자 중국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부인과 함께 극적으로 홍콩으로 탈출했습니다. 

아무리 스타라고 해도 탈출과 피난은 고난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이혼했습니다.


김염은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한 다음에 상하이로 돌아왔습니다.

국공내전을 거쳐 드디어 중국은 마오쩌둥의 중국이 되었습니다. 김염은 공산당 가입을 회피하고도 일급배우로 임명됐습니다.

그는 사회주의를 지지했지만 현실적인 당적을 갖는 것은 구속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국가가 임명하는 일급배우는 굉장했습니다. 장관급 이상의 대우를 받는 명예와 실권이 주어지는 타이틀이었지요.


이 시기에 두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친이(秦怡)라는 훌륭한 여배우였습니다.

끝까지 함께 한 반려자입니다.


그러나 김염의 인생 후반은 불행했습니다. 1950년대 초반 위장병이 심해졌고, 그걸 수술하다가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더이상 영화활동은 하지 못했습니다. 말년 20여 년을 병상 또는 병상 주위에서 살았습니다.


문화혁명 시기에 김염과 친이 부부 모두 고초를 겪었습니다.

문화혁명에서 영화 연극 등의 문화계 공작과 탄압을 주도한 장칭(江靑) 역시 1930년대 상하이 영화계의 배우였지요.

그러나 1930년대의 장칭은 김염 근처에도 오지 못한, 그저 그런 배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김염는 1983년 12월 27일 일흔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두번째 조국 중국에서 말입니다.


1995년 중국영화 90주년을 기념해서 중국영화 최고의 남자배우 10인에도 선정됐습니다.

중국에서 그의 이름은 지금도 살아 있는 이름입니다, 영화황제 김염~!!


------------------------------------------------------------------------




그의 이름과 인생과 영화는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995년까지는 그랬습니다.

분단의 차단벽과 냉전의 철조망이 그렇게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김염의 큰형인 김영(김덕봉) 집안에서 1995년 KBS에 김염의 존재를 알렸고, 그해 김염은 다큐멘터리로 방송이 됐습니다.

이를 계기로 김영(김덕봉)의 외손녀인 <박규원> 님이, 자신의 작은 할아버지인 김염이란 존재를 직접 찾아나섰습니다.


그는 일가친척과 관계자들을 찾아 미국 캐나다 중국 등을 다니면서 김염의 흔적을 찾아냈습니다. 

상하이로 가서 김염의 부인 친이도 만났습니다.


그런 탐사의 결과를 글로 정리해서 2003년 단행본으로 발표했습니다. 그게 바로 아래의 책입니다.


(2003년 민음사 출간. 새 책은 없고, 중고서적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아니면 도서관에서 찾는 수밖에~)




독립운동가의 가족은 상당수가 탄압과 가난 속에 허덕였고, 해방 후에도 친일파들이 주도하는 나라에서 찌그러진 삶에 빠졌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만이 나라의 도움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힘든 세상을 뚫고 명망가로 살아났습니다.


그 가운데 희귀한 경우가, 중국에 남아 중국에서 빛을 본 경우입니다.

김염이 바로 그런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인생의 격류 속에 두 개의 조국을 갖게 된 영화황제 김염.


어제 하루 종일 이 책을 읽었습니다. 아차산에 잠시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밤 11시가 되어서야 책을 덮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어제 읽은 것들을 떠올리면서 일기를 씁니다.

2월 초순에 상하이에 가면 김염의 묘소를 한번 찾아볼 생각입니다. 복수원(福壽園)이란 묘원에 있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북경 (5)자금성 (12)서안 (2)먹거리 (19)티벳 (6)내몽고 (4)아름다운중국 (6)오악 (7)기타 (9)
게시물 검색
항공권, 비자, 여행자보험 신청
(주)포인트투어
서울시 종로구 삼봉로 81 파빌리온
카톡 :   위챗 :
전화 : 010-0000-0000
호텔예약 문의
서울시 종로구 삼봉로 81 파빌리온
카톡 :   위챗 :
전화 : 010-0000-0000
공항픽업, 렌트카 예약, 여행문의
서울시 종로구 삼봉로 81 파빌리온
카톡 :
위챗 :
전화 : 010-0000-0000

금면왕조, 조양서커스, 노사차관, 이원극장, 홍극장, 십찰해극장, 마담투쏘, 고북수진, 북경시내관광, 북경시외관광 전문 여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