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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악] 오악-북악 항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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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셀프차이나 작성일14-06-17 19:42 조회313회 댓글0건

본문

하나의 장벽마냥 하늘과 땅 싸이에 우뚝 솟아 있다. 경탄을 자아내는 천하의 경관이 왜 깊은 산 속의 협곡에 숨어 있을까?

사회자:

안녕하세요.

‘지리•중국’프로 시간입니다.

썽춘입니다.

지난 프로 시간에는 남악 형산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남악 형산이 수려함으로 유명하다면 북악 항산은 웅장하고 기세가 드높다고 형용할 수 있는데요.

형산이 유명한 것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풍경 덕분인 것도 있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중국 판도에서 위치한 자리가 아주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항산이 중국 수 천년의 역사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항산은 대체 어떤 산일까요?

항산은 오악 가운데서의 북악이다. 항산 산맥이 동쪽의 타이항산으로부터 서쪽의 뤼양산에 이르기 까지 500리를 구불구불 이어져 나갔으며 허베이와 산시 두 성을 걸쳐 있다.

주봉인 톈펑링(天峰岭)은 산시 다퉁(大同) 훈위안(浑源)현 경내에 위치해 있다.

항산이 북악이라는데 대한 가장 이른 문자 기록은 진나라 복생이 지은 ‘상서’이다. 오악이란 동악 대(태)산, 남악 곽산, 서악 화산, 중악 숭산, 북악 항산이다

일찍 3천여년 전, 오악이 이미 정해졌다.

그러나 항산과 동일한 위도에 위치한 중국 북방을 보면 동쪽에는 타이항산 서쪽에는 뤼량산 남쪽에는 우타이산과 같은 수많은 산맥이 우뚝 솟아 있는데 왜 유독 항산만이 오악의 영예를 지닐 수 있었을까?

예쑤팡:

북악과 우타이(산) 사이에는 후퉈 강이 끼어 있습니다.

명성을 놓고 보아도 우타이(산)의 인지도가 북악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하지만 옛 사람들은 우타이(산)이 아닌 항산을 선택했는데요.

그들은 아마 그때 전략적 위치를 고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항산의 지리적 위치는 어떤 범상치 않은 점이 있을까?

항산이 지닌 전략적 의미는 또 어디에서 체현되는 걸까?

'지리•중국프로팀은 북악 항산의 비밀을 더 많이 밝히기 위해 항산에 도착했다.

기자:

뒤에 보이는 이 군산이 바로 항산인데요.

항상산맥은 동서 주향으로 허베이성과 산시성의 북부에 걸쳐 있습니다.

이곳은 네이멍구와 거의 벽 하나를 사이 두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역사적으로 항산은 줄곧 국가 강역의 북방 국경선이었고 북방 유목민족과 중원 농경민족의 천연적인 분수령이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얘기하는 북악 항산은 산시성 훈위안현 경내에 위치한 주봉 톈펑링을 가리킨다.

항산은 동서로 500리를 구불구불 이어진 산맥으로 허베이와 산시 두 성을 걸쳐 있다.

대부분 산체는 산시성 북부와 네이멍구의 경계선인 다퉁시에 위치해 있다.

역사적으로 항산에서 북쪽으로는 북방 유목민족의 집거지였고 항산에서는 남쪽으로는 한민족이 생활하는 중원지역이었다.

항산은 하나의 천연적인 장벽마냥 몽골고원과 화북평원 사이에 우뚝 솟아 있으며 예로부터 군사 전문가들이 다투어 쟁탈하던 곳이다.

천야오화:

동쪽은 타이항(산)이고 서쪽은 뤼량(산)입니다.

이 두 갈래의 산맥은 거의 남북향으로 되어 있고 항산은 동서향으로 되어 있습니다.

H형에 있는 그 가로금 마냥 이 두 산맥을 연결시키고 있는데요.

그 위에 많은 요로가 분포되어 있는데 몽골고원에서 화북평원으로 진입하는 것을 통제하는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역사 전문가는 항산이 북악으로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항산의 지리적 위치가 전략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 분석했다.

누군가 항산을 중원의 문호 화북의 요새에 비유했다.

관내의 농경민족에 있어 항산은 자물쇠와 같은 존재였다.

요새를 지키고 국경을 통제하는 천연 요새 항산으로 하여 유목민족이 관중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관외의 유목민족에 있어 항산은 자물쇠와 같은 존재였다. 항산이라는 문만 연다면 중원으로 들어와 넓고 비옥한 중원대지를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자:

항산이 군사 요새로 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 위치 외에도 산의 형태 지모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북송의 산수화가인 곽희가 일찍 항산의 지모를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태산은 앉은 듯하고 화산은 서있는 듯하며 형산은 날아갈 듯하고 숭산은 누워있는 듯하며 항산은 움직이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움직’이다란 단어 하나로 항산의 수많은 봉우리가 구불구불 이어지고 큰 기복을 이룬 천연장벽의 산세 특징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넓은 화북평원에 항산과 같은 천연장벽이 형성됐을까요?

항산이 형성된 원인을 밝히기 위해 고찰대는 지질 전문가와 함께 톈펑링 기슭에 있는 절벽으로 갔다.

눈앞의 산봉우리는 하늘 높이 우뚝 솟았으며 장벽마냥 아주 웅장했다.

그러나 하늘 높이 우뚝 솟은 기암절벽이 오래전 바다 밑에서 수 억년이나 잠들어 있었을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예쑤팡:

캄브리아기와 오르도비스기인 지금으로부터 5억 4천만년에서 4억 4천만년까지의 1억년 사이에 전반 화북의 대륙판은 전부 망망한 바다였습니다.

이 바다에 침적된 것이 모두 탄산암 즉 탄산칼슘이었습니다.

탄산칼슘이 굳어지면서 석회담으로 되었습니다.

항산의 주봉인 톈펑링의 돌은 5억년 전 바다 밑에서 침적되어 형성된 석회암이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지표 위로 노출되어 현재와 같이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이루었을까?

동행한 지질 전문가가 우리에게 항산 석회암의 특징을 소개했다.

덩취안, 산시성 지질답사국 211 지질대 물질답사 고급공정사 항산의 지질 형성원인에 대해

깊이 연구한 바 있다.

덩취안:

일반적으로 침적될 때는 수평으로 되어 있는데요.

일부 경우에는 지각운동으로 심하게 치우치거나 약간 치우치게 됩니다.

기암절벽의 형성은 주로 경사에 의해 결정됩니다.

아래 흰 부분을 보세요.

흰 부분이 가리키는 것이 도수인데요.

약 14도입니다.

14도요. 그렇습니다.

뭘 설명하는가요?

경사를 알려주는 것이지요.

경사가 작죠.

네, 총체적으로 볼 때 비교적 완만한 것입니다.

그래서 겹쳐지면서 가파로운 벼랑이 될 수 있었던거네요.

맞습니다.

가파로운 벼랑은 경각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다면 경각의 크기는 또 무엇과 관계될까?

예쑤팡:

지진은 누구나 잘 알고 있잖아요.

지진이 일어날 때 어떤 경우에는 지진 표층의 집 땅이 좌우나 앞뒤로 이동합니다.

어떤 집은 상하로 움직이며 무너지기도 하지요

집이 이동할 때는 수평력이 주로 작용하지만 무너질 때는 수직력이 주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얘기하는 항산은 바로 후자의 경우에 속합니다.

지하 수직력의 작용아래 바다 밑에서 수 억년간 잠들었던 석회암이 지표 위로 떠밀려 올라왔으며 수평으로 세워진 암층 형태의 본 모습을 유지했다.

만약 항산이 동서주향으로 500리를 구불구불 이어진 산맥이 아니었다면 한 갈래의 천연장벽으로 중요한 군사 요새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항산산맥의 방향은 또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예쑤팡:

2천여년 전 항산의 북쪽과 남쪽에 각각 한 갈래의 평형된 단열이 생겼어요.

이 두 갈래의 단열이 전반 항산을 들어올렸는데요.

단열된 길이가 대체적으로 항산의 길이입니다.

전문가에 따르면 2천만년 전, 항산의 남북 양쪽에 각각 한 갈래의 큰 단열이 생겼다.

항산이 융기된 것은 바로 이 두 갈래의 단열대를 따라 위로 수직 상승하면서 오늘날 동서주향으로 500리를 구불구불 이어진 항산을 조성했던 것이다.

현재 우리는 톈펑링의 뒷산에서 단층에 의해 남겨진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구불구불한 산등성이에 왜 장성의 유적지가 나타났을까? 오래된 성벽이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어떻게 이야기할까? 한 개의 산이 어떻게 수많은 영웅들을 무릎 꿇게 했을까?

기자:

이곳이 바로 항산에서의 옛 장성 유적지입니다.

예전에는 중요한 군사방어시설이었는데요.

성벽의 북쪽은 북방 유목민족의 집거지이구요.

성벽의 남쪽은 농경을 주로 하는 중원대지입니다.

항산은 마치 한 갈래의 천연적인 장벽마냥 두 구역을 갈라놓았습니다.

중국 수 천년의 역사는 줄곧 전쟁의 화염에 휩싸였다.

북방 유목민족의 칩입을 막기 위해 중원인들이 발명한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장성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 위대한 공사는 중국의 첫 번째 봉건왕조인 진나라때부터 이미 시작 되었으며 줄곧 명나라까지 지속되었다.

그간 단속적으로 약 2천년을 수리했다. 그 사이 봉건 통치자들은 안과 밖에 각각 하나씩 2개의 장성을 건설했다.

외장성은 바로 진시황이 산시 다퉁 북쪽에 있는 다칭산 위에 건설한 옛 장성이다.

강산을 완전하게 지키기 위해 훗날의 정권자들은 다퉁 이남의 항산에 한 갈래의 장성을 건설했다. 이것이 바로 내장성이다.

이는 북방 유목민족을 방어하는 두번째 방어선이었다.

외장성과 내장성이 중국 북방의 강대한 군사방어 체계를 구축했다.

기자: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고 오랜 세월 전쟁에 시달리면서 장성의 일부가 파손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에도 여전히 그때의 기세와 역할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사료 기재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20여 명 황제가 전쟁 때문에 항산일대로 왔었고 13명의 황제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항산에서 전쟁을 치렀다고 한다.

흉노와의 전쟁에 나선 조나라 이목 진나라 목념, 양한시기의 곽거병, 돌궐 회홀 몰아내기에 나선 당나라 설인귀, 기단 여전을 대항하기에 나선 송나라 양연소, 몽골과 싸우던 명나라 상우춘 이같이 천추에 이름을 길이 빛낸 역사 명장들이 모두 항산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요새를 성공적으로 지키려면 단지 장성에 의거해서만은 모든 근심 걱정을 덜 수는 없었다.

몇 백리 구불구불 이어진 항산의 산맥 가운데는지세가 상대적으로 완만한 산곡도 있었다.

이런 곳의 경사가 완만했기 때문에 유목민족이 중원으로 칩입하는 돌파구로 되었다.

때문에 이런 요새를 잘 지키는 것은 방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옌먼관(雁门关)이다.

옌먼관은 항산산맥의 서쪽 구간인 거우주펑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먼 옛날 북방 유목민족이 중원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통로였다. 특별한 전략적 위치 때문에 옌먼관은 예로부터 군사 전문가들이 기필코 쟁탈하는 지역이었다.

리둥둥:

항산을 중원과 요새 밖을 갈라놓는 천연장벽으로 본다면 옌먼관이 있는 자리가 바로 항산의 서쪽 구간으로 지세가 상대적으로 완만한 곳입니다.

지세가 아주 낮고 완만했기 때문에 소수민족이 남하하는데 중요한 돌파구로 되었습니다.

중원과 요새 밖의 민족관계가 긴장하던 시기에는 군사 요새의 역할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옌먼관을 얻으면 중원을 얻게 되고 옌먼관을 잃으면 천하를 잃게 된다’는 말도 있구요.

옌먼관은 2천여년 전의 전국 말기에 건설되었다.

오래된 관루는 전쟁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평화연대에는 남북의 상업무역왕래를 잇는 중요한 길이기도 했다.

리둥둥:

이것은 예전에 형성된 바큇자국입니다.

옌먼관에서 군사대항을 제외하고 상업의 번영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입증이기도 하지요.

역사 기재에 따르면 지나가는 차량이나 인파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밤낮으로 지나간 차량이 얼마나 되는지 가히 상상할 수 있어요.

그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것이 명청 두 조대 산시 상인들의 굴기입니다.

교치용와 같은 수많은 산시 상인들은 전국 각지로부터 상업무역 물품을 모아서는 구불구불하고 가파로운 옌먼관의 관도를 거쳐 관외로 운송해 갔습니다.

한 갈래는 허베이의 장자커우를 거쳐 가고 다른 한 갈래는 산시 유위의 사후커우를 거쳐 갔습니다.

노정은 다르지만 최종의 목적지는 모두 중러변경의 캬흐타였습니다.

전반 옌먼관의 관도는 600년의 휘황찬 역사를 이어온 산시 상인들에게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죠.

현재 옌먼관의 성루에 그때 산시 상인들이 돈을 내 옌먼관을 건설한 내용을 기록한 석비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옌먼관은 북방 유목민족이 중원으로 칩입하는 것을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항일전쟁에서도 혁혁한 공헌을 세웠다.

항일전쟁 초기 일본 군이 중국 북방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옌먼관을 거쳐 산시로 쳐들어가 중원을 점령하려 했다.

하지만 중국을 지키는 군사들이 옌먼관에 대량의 병력을 배치한 점을 고려해 갑자기 방향을 바꿔 옌먼관에서 동쪽에 있는 또 다른 요로를 선택했으며 중국 항일전쟁 역사에서 휘황한 역사로 되고 있다.

기자:

북방 유목민족의 칩입을 막기 위해 중원인들은 항산 위에 천연적으로 형성된 일부 협곡과 고랑을 이용해 군사 관문을 설치했는데요.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옌먼 열여덥개 요새라는 미명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은 항산 남쪽의 지맥에 설치된 군사 요지 핑싱관인데요.

항일전쟁 초기의 핑싱관대첩이 바로 이곳에서 발생되었습니다.

1937년, 일본군의 중국 침략 화염이 빠른 속도로 산시까지 뒤덮었다.

중국 군은 핑싱관의 지형우세를 이용해 천명의 적군을 소멸했다. 이는 전쟁을 치러서부터 처음으로 되는 섬멸전이었으며 중국인의 항일 의지를 더욱 격려했다.

현재 핑싱관 양쪽의 장성은 길을 수리하면서 없어지고 그저 파손된 한 채의 관루만 남겨져 전에 이곳에서 일어났던 피 비린내 나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사회자:

산꼭대기에 장성을 건설하고 요새를 설치했는데요.

이런 조치는 항산이라는 천연장벽을 충분히 이용해 항산만의 군사적 역할을 심분 발휘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항산을 지키려면 또 한 곳을 지켜야 하는데요.

항산에는 수많은 협곡이 천연적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협곡은 북방 유목민족이 중원으로 들어오는 통로였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런 협곡들에서 수많은 전쟁이 남겨진 흔적을 여전히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깊고 그윽한 협곡에 신비한 석동이 나타났다.

천연적으로 형성된 것일까?

아니면 인공으로 뚫은 것일까?

역사 전문가가 현장고찰을 거쳐 석동에 숨겨진 놀라운 비밀을 밝힌다.

항산의 주봉인 톈펑링과 서쪽의 추이핑펑 사이에 한 갈래의 협곡이 있다. 협곡의 가파로운 절벽 위에 일부 사각형의 석동이 잔류되어 있다.

전하는데 따르면 이는 간도를 건설할 때 남긴 흔적이라고 한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전에 천군만마가 이 간도를 지나갔으며 이는 간도 또한 강대한 민족을 도와 중화민족 역사에서 널리 이름을 알린 왕조를 탄생시켰다.

이 간도는 누가 건설한 것일까? 왜 항산의 협곡에 뚫린 것일까?

고찰대는 쑨이 훈위안현 문물국 전문가와 함께 협곡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쑨 선생은 이 협곡을 진룽샤라 하는데 츠샤커우라고도 부른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에게 이런 석동의 유래를 설명했다.

기원 386년, 선비족이 몽골고원에서 강대한 정권을 세웠다.

그들은 항산을 지나 강토를 개척해 더 큰 왕조를 건립할 속셈이었다.

그러나 항산의 기타 요새에 막강한 군대가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키기는 쉬워도 공격하기는 아주 어려웠다.

중원을 점령하기란 사실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래서 선비족은 눈길을 진룽샤로 돌렸다. 그때 진룽샤에 세차게 흐르는 큰 강이 있었는데 물살이 너무 세기 때문에 갈만한 길이 없었던 것이다.

쑨이:

그때 북악 항산을 지나갈 수 없었어요.

천연적으로 생겨난 아주 좁은 길 밖에 없었거든요.

양쪽의 절벽을 보세요 얼마나 가파로워요.

아래에는 1년 사계절 물이 흐릅니다.

지나갈 수 없으니깐 절벽 위에 간도를 건설할 수 밖에 없었지요.

고찰대는 협곡 양쪽의 절벽 위에서 일렬된 석동이 두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선비족은 왜 동시에 두 갈래의 간도를 건설했을까?

총명한 선비족은 현대인들이 길을 수리하는 지혜를 운용하여 한 갈래는 들어가고 한 갈래는 나오는 데 이용했다.

마치 고속도로의 쌍향 찻길처럼 만들어 운송 효율을 크게 향상시켰던 것이다.

기자:

츠샤커우를 나오니 지세가 아주 넓고 평탄한데요.

제 앞쪽이 바로 중원지대 입니다.

일찍 천여년 전 북방의 선비족은 바로 이 통로를 지나서 중원으로 들어왔으며 그곳에서 북위 왕조를 세웠습니다.

두 갈래 간도가 신비롭게 뚫린 후로 선비족은 남쪽으로 대거 이동했으며 천연 요새 항산을 지나 중원을 장악했다.

기원 439년, 북위는 북방을 완전하게 통일했다. 중국 역사도 이때부터 남북조 시대에 들어섰다.

북위의 역사는 항산이 중국 역사에서의 중요한 지위를 입증한다. 전에 전국 명사 장의가 ‘항산의 가파로움은 천하의 등마루를 깎을 수 있으며 항산을 얻는 자는 천하를 얻는다’고 말했다.

항산은 크고 웅위로우며 끊임없이 구불구불 이어진 천연 요새이기에 지리적 위치의 전략적 가치가 아주 높다.

이로 오악 가운데서 북악의 지위를 얻게 되었으며 더욱이 중국 역사를 기록하고 중화문화를 그려낸 한 폭의 자연화라고도 불리운다.

사회자:

항산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항산은 특수한 지리적 위치로 중요한 군사적 가치가 있는 외 세계적인 기이한 풍경을 빚어냈는데요.

이것이 바로 쉬안쿵사입니다.

그렇다면 쉬안쿵사가 왜 항산에 지어진 것일까요?

절벽 위에 천여년이나 걸려 있으면서 떨어지지 않는 비밀이 항산의 지형지모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요?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지리•중국’프로를 시청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썽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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