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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악] 오악-동악 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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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셀프차이나 작성일14-06-17 19:38 조회3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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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악의 으뜸 인문성산 얼마나 막중한 역사의 무게를 담고 있는가? 오래된 암석이 오묘하고 기이한 세계를 펼치며 또 얼마나 많은 지구의 변천을 보여주고 있는가? 지질 전문가를 따라 태산 암석 고찰을 떠난다. 오래된 암석이 과연 어떤 지질전설을 그려낼까?

안녕하세요. '지리•중국' 프로 시간입니다. 썽춘입니다.

중국의 명산대천하면 자연스레 삼산오악을 떠올리게 됩니다. 세 개의 산은 고대 제왕이 장생불로의 약을 구하기 위해 바다 위에 지어 낸 3개의 신산(神山)을 가리키지만 오악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오악의 지위가 아주 높은데요. 일찍 한 나라의 강역을 대표해 중화민족 5천년의 문명진척을 입증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중국 인민 민족사상의 상징으로 됐는데요. 널리 이름을 떨친 오악이 대체 어떤 산이며 어떤 독특한 형태와 지모를 가졌을까요? 오악이 중국 판도에서의 위치에는 또 어떤 특수한 부분이 있을까요? 오늘부터 지리적인 시각으로 서로 다른 오악에 대해 소개하렵니다.

드넓은 중국 판도에5대 명산이 우뚝 솟아 있다. 바로 동악 태산, 서악 화산, 남악 형산, 북악 항산과 중악 숭산이다.

하늘 위에서 오악을 내려다 보면 재밌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형산 항산 태산 화산 숭산 북위 34도 동경 113도

중악 숭산을 기점으로 동서방향이 한 갈래의 선으로 연결되었다. 태산이 조금 북쪽으로 올라와 있는 외에 이 선은 기본적으로 북위 34도에 위치해 있다. 남북방향으로는 완전히 한 갈래 직선 위에 놓였으며 동경 113도에 위치해 있다. 이 두 갈래의 중심선이 십자형을 이루었다.

이런 현상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악간의 가장 먼 거리가 4개 성을 뛰어넘었으며 그 어떤 현대화 측량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토록 깊은 뜻이 담겨 분포되어 있지 않는가?

캉쩐 베이징사범대학 문학원 교수

동악에서 더 나아가면 바다입니다. 북악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초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서악에서 더 서쪽으로 나아가면 신장 이남인데 예전의 돌궐지역입니다. 남악의 형산을 포함한 남쪽이 먼 옛날에는 형산 상강이남과 링난지역으로 사실상 교화가 미치지 못한 지역이었습니다.

오악은 산시(陕西), 산시(山西), 허난, 산둥, 후난 등 여러 성을 아우르고 있으며 각기 황허 강 중하류와 창장 강 중하류 유역에 속한다.

전에 제왕의 통치 구역이였기 때문에 오악의 확립은 중국 고대 통일사상이 지리에서의 체현이라 할 수 있다. 전에는 신주 화하 중화의 대명사였다. 이렇듯 신성하고 존귀한 지위는 중국 기타 명산대천이 비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오악과 중국 민간문화가 서로 융합되고 어우러지며 일반 백성의 생활과도 밀접히 연관되었는데 이는 중국 산천문화에서도 보기 드문 것이다.

백성들도 오악을 좋아합니다. 아들을 낳고 자손이 번창하기를 바랄 때에도 향을 피우고 불상을 향해 절을 오리기 위해 오악을 찾아갑니다. 작은 산이나 사원에도 갈 수 있잖아요. 그러나 오악으로 가는 것을 비교적 중시했어요. 사실상 5대 명산이 오랜 세월의 문화 축적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죠.

오악은 중국 고대 왕조의 강역 좌표와 국토 상징이었다. 오악의 범위는 구주, 신주, 화하지역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이들은 서로 갈라놓을 수 없는 문화로 지어 일부 전문가들은 중국인들이 오악을 민족사상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한다.

천야오화 베이징대학 환경학원 부원장

나라가 망했으나 산하는 예와 다름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여기서 나라는 정권을 말합니다. 정권은 끊임없이 교체될 수 있지만 한 민족은 영원히 존재합니다. 민족의 절개나 사상은 영원한 것이지요. 그래서 나라가 망했으나 산하는 예전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높은 산과 큰 강에높은 기개를 비유하잖아요. 아름다운 강산으로 우리 민족의 사상이나 민족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악은 자연적인 산천의 틀에서 벗어나 사상적인 상징으로 되었고 나라 민족 산과 하천의 또 다른 표달방식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눈부신 타이틀을 내려놓았을 때 5대 명산은 과연 어떤 산이며 지형 지모에는 또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이 시간부터 오악을 하나씩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 바로‘오악독존’의 미명을 가진 동악 태산입니다.

지난 태산

태산은 오악가운데서의 동악으로 산둥성 중부의 화북평원 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산둥성 성도인 지난시와 7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한나라 때 오악을 확정지어서부터 태산은 줄곧 오악 중의 으뜸으로 불렸다. 태산은 땅을 뚫고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산둥대지에 자리를 잡았으며 풍부한 지리 역사 문화적 내포를 담고 있다.

일찍 공자는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아 보인다”며 감탄했다. 두보는 “반드시 산 정상에 올라 뭇 산의 작음을 한 번에 보리라”는 천년 명언을 남겼다.

2000여 년간 수많은 역사문화 명인이 태산에 다녀가면서 2000여 개의 석각예술품을 남겼으며 이로 높고 웅위로운 태산이 특별한 문화적 매력을 풍기게 되었다.

왜 그렇게 많은 문인들이 태산의 암석에 글귀를 새겼을까요? 모든 역사 인륜은 교체되고 없어져요. 그러나 화강암 흐르는 물은 영원히 존재하잖아요. 자신의 도리나 글귀 이미지 같은 것이 오래 전해지고 사라지지 않게 하려면 돌에 새기는 것 뿐입니다.

태산은 역사문화 명산일 뿐만 아니라 잠재량이 풍부한 자연지질 보물고이기도 하다. 태고시대로부터 신생시대에 이르기 까지 여러 지질시기의 변천과정을 겪었으며 풍부한 지각운동 유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세계적인 지질과학 연구가치가 있다.

이렇듯 눈부신 타이틀을 지닌 중화명산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요? 그리고 어떻게 ‘오악독존’이라는 빛나는 영예를 지닐 수 있었을까요?

태산을 더욱 전면적으로 알기 위해‘지리•중국’촬영팀은 지질 전문가와 함께 태산에 도착했다. 자연지질과 역사문화의 근원을 찾고 태산이 ‘오악독존’으로 불리우는 해답을 얻기 위해서다.

장젠핑 중국지질대학 교수

장젠핑, 중국지질대학 교수 지구 환경연구분야의 전문가이다.

장 교수는 중국의 수많은 명산가운데서 태산은 암반이 형성된 연대가 오래고 종류가 풍부하며 완벽하게 보존된 것으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와 함께 태산 위의 암석을 고찰하기로 결정했다.

고찰대는 풍경구 산먼으로부터 출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훙먼 풍경구의 주이신위안(醉心园)에 도착했다

이곳에 들어서니 조형이 특이한 돌이 눈에 들어왔다. 돌이 밖으로부터 안으로 굽어들어 원형 모양을 이루었는데 지질 전문가는 이런 암석 구조를‘통모양 구조’라고 불렀다.

통모양의 이런 구조를 세계의 다른 곳에서도 거의 발견하지 못했지요.

보기 드문 것이지요.

다른 곳에 없다고는 장담할 수 없어요

그러나 보기 드문 지질 현상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공자

전하는 데 따르면 2000여 년전 공자가 태산으로 글을 가르치러 갔다가이 바위 아래서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형태가 특이한 바위에 감탄해 주이신쓰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현재까지도 학술계에서는 주이신쓰(醉心石)의 형성 원인에 대해 의견차이를 보이고 있어 더 깊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주이신쓰의 형성 연대는 이미 확정되었다.

현재의 최신 자료를 볼 때 16.2억년 좌우입니다.

16.2억년 전 지구에는 온통 바다였으며 저급 조류나 무척추동물만이 바다에서 번식했다. 주이신쓰가 바로 그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비록 형성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한 답을 얻지 못했지만 오랜 형성 연대는 놀라움을 자아낸다.

그러나 장 교수는 이런 바위가 태산에서는 연대가 가장 이른 암석이라고 얘기했다. 이 말에 우리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렇다면 태산에서 가장 오래된 암석은 과연 몇 년이나 됐을까?

형태가 특이한 태산 암석이 과연 어떤 오랜 역사를 그려내고 있을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군산 속에 또 얼마나 많은 지질 경관이 숨겨져 있는 걸까?

주이신위안에서 2시간 위로 톺아올라 해발이 500여 미터인 헤리룽탄에 도착했다. 이곳에 도착하니 거대한 암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장 교수는 이것이 바로 태산의 주체 암석을 구성한 화강암이라고 말했다.

원고시대 지하 암장이 지각 열극을 따라 위로 올라가고 온도가 내려감에 따라 지표와 수천 킬로미터내지 10여 킬로미터되는 곳에서 냉각되고 응결되어 암석으로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억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장 교수는 눈앞의 이런 암장 관입암을 학술적으로 몬조니암 화강암이라 부르고지질학자들은 ‘아오라이산암체’라고 부르는데 널리 이름을 알린 양질 석재라고 말했다.

장젠핑 중국지질대학 교수

암석 특징을 보면 그때 지하의 깊은 곳에서 형성된 서로 다른 깊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깊이가 상대적으로 비교적 옅은 것은 응축속도가 아주 빠르기 때문에 암석의 알갱이가 보드랍고 암석의 내후재력도 더욱 뛰어납니다. 그래서 질좋은 석재가 될 수 있었던거구요.

태산의 화강암은 단단하고 조밀하다. 오랜 세월동안 중국의 수많은 웅위한 건축에 사용된 기석은 모두 태산에서 얻은 것이다. 그렇다면 25억년 전의 화강암이 태산에서 가장 오래된 암석일까? 이에 장교수는 아니라는 답을 내놓았다.

고찰대는 계속 길을 재촉했다. 해발이 1400여 미터인 왕푸산 (望府山)에서 흑백 무늬가 번갈아 새겨진 암석이 우리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장 교수는 이는 전형적인 태산 관상석이라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태산석가운데서 아주 전형적인 대표라는 것입니다.

가운데 복잡하고 예쁜 무늬가 있잖아요.

현지인은 이런 돌을 산수석이라 부르고 지질 전문가는 이를 편마암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편마암의 이렇듯 독특한 무늬는 대체 어떻게 생긴 걸까?

장젠핑 중국지질대학 교수

원시적인 암석이 형성될 때 암장이 지각 속으로 침투되어 관입암으로 되었습니다. 이런 암석이 지표 위로 아직 노출되지 않았을 때 지각의 운동으로 암석이 아래로 움직이며 지표와 20킬로미터 되는 곳에 묻혀버렸습니다.

장 교수에 따르면 지하 20킬로미터 되는 깊이에서 거대한 압력과 1700도의 고온에 의해 이미 형성된 암석이 다시 용융되었다. 따라서 암석의 일부 성분이 융해되어 일부는 백색의 결정으로 되었다. 백색의 결정체와 원래의 청흑색 암석이모두 반유질상태로 되었으며 지질작용아래 문질러지고 뒤섞여졌다. 지각활동이 끝나고 암장이 냉각되자 흑백 무늬가 있는 편마암으로 형성된 것이다.

장 교수는 왕푸산 편마암은 전형적인 변질암으로 27.4억년 전에 형성된 것이지만여전히 태산에서 가장 오래된 암석은 아니라고 말했다.

장 교수를 따라 고찰하는 동안 우리는 해발이 높을 수록 태산 위 암석의 연대도 더욱 오래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제 곧 꼭대기에 도착한다. 가장 오랜 암석이 바로 저 앞에 있을까?

위황딩 톈제 왕푸산 난톈먼

해발이 1500미터인 태산 톈제에 이르니 독특한 암장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 갈래의 적갈색 암석이 청흑색의 암체 속에 깊숙이 꽂혀 있었다. 장 교수는 원고시기 지질운동으로 남겨진 흔적이라고 말했다.

전에는 이 두개가 동일한 암체에 속했습니다. 지금 보게 되면 이것과 이것은 형태나 색깔 구조상으로 서로 다릅니다. 이것은 다른 암체에 속하는 것이구요.위에 있는 이 암석은 아래에 있는 암석보다 5000만년 가량 일찍 형성됐습니다.

장 교수는 해발이 높을 수록 태산 암석의 연대가 더 오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눈앞의 상하 두 층으로 된 청흑색 암체는 25.5억년 전에 형성된 화강암이다. 전문가는 이를 위황딩 암체라 불렀다. 위황딩 암체가 형성된 5000만년 이후 또 다른 암장이 암체 가운데의 열극을 따라 스며들고 냉각되면서 적갈색의 암석을 형성했다. 후기에 침투된 조대형 암석을 암맥이라 부르는데 연령은 25억년이다.

교차되면서 침투될 때는 암장이었기 때문에 그때는 움직이는 물건이었습니다. 암장이 원래 고체의 암석 속에 침투될 때 아주 특이한 지질현상이 생기는데요. 그것을 응축변두리라고 합니다. 함께 가봅시다. 지금 보이는 이 변두리가 바로 전형적인 응축변두리입니다. 아오라이산암체가 위황딩 암체 속으로 침투되면서 암장이 응축되는 현상이 생깁니다. 이 곳은 고체 암석이기 때문에 온도가 낮지만 여기 중간의 온도는 높습니다. 그래서 응축되는 속도가 빨라요. 광물질의 알갱이가 더욱 보드라워지며 이런 변두리를 형성했습니다.

장 교수는 25억년 전 지구의 암장활동이 아주 활발했으며 태산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다양한 시기 암장 활동의 유력한 증거는지질 전문가에게 원고시대에 일어난 지질활동의 전모를 추연할 수 있는 근거로 되고 있다고 말했다.

고찰을 통해 태산지역 지질운동의 오묘함과 복잡함을 알아냈다. 그러나 왕푸산 편마암보다 더 오랜 암석은 여직 발견하지 못했다. 산 위에서 내려가다가 산기슭에서 해발이 200미터가 안되는 개울을 발견했다. 그곳에 흑백 무늬가 뒤섞인 암석이 형성되어 있었다. 겨울에 물이 말라서인지 쓸쓸해 보였다. 그러나 현지인은 이곳이 태산에서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했다.

기복을 이룬 무늬는 암석 위에 응고된 유수마냥 물결에 대한 기억을 두꺼운 태산석에 깊이 새긴 듯 했으며 더욱이 변화무쌍한 환상의 음악을 들려주는 것만 같다.대자연의 신기함에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

장 교수의 해석으로 고찰내내 우리의 의구심을 자아냈던 비밀도 따라서 밝혀졌다.

장젠핑 중국지질대학 교수

아마 태산 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암석일 것입니다. 형성 연대는 28억년 위로 약 30억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장 교수는 28억년 전 지구에는 바다가 널리 분포되었으며 태산 지역에 암장 활동으로 형성된 일부 오래된 암석이 지질구조의 동력아래 끊임없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지하 20킬로미터 되는 곳에 묻혀졌고 고온 고압의 영향을 받아 변질암으로 되었다고 말했다.

29억년부터 16억년 사이 땅 속의 암장활동이 또 다시 활발해졌다. 뜨거운 암장이 지하의 열극을 따라 위로 침투되었으며 그 과정에온도가 내려가고 점차 냉각되면서 대면적의 화강암을 형성했던 것이다. 이런 화강암이 형성된 후에도 새로운 암장이 끊임없이 위로 침투되면서 원래의 암체를 파괴하고 새로운 암맥을 형성했다.

이렇게 끊임없이 순환 왕복하고 침투되고 바뀌면서 결국 태산 위에 복잡한 여러가지 암석을 만들어냈으며 세인들에게 정묘하고 뛰어난 지질 절경을 선사했다.

28억년 전의 오래된 암석이 어떻게 현재까지 보존되었을까? 오악독존이라는 최고의 영예 뒤에 대체 어떤 이유가 숨겨져 있는 걸까?

지질 전문가는 아무리 견고한 돌일지라도 나중에는 흙과 먼지로 된다고 말했습니다. 대자연의 바람과 비의 침식을 막아낼 수 없기 때문이죠. 암석이 풍화되고 와해되어 흙으로 되기 까지 수 천만년이 걸리고 가장 오래 걸리는 것도 수 억년이면 가능한데요. 그러나 태산 위에서 본 가장 오래된 암석은 28억년이나 되었습니다. 28억년 전의 암석이 어떻게 현재까지 보존될 수 있었을까요? 심지어 전문가는 태산이 비교적 젊은 산이라고 말합니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일까요?

루쑹녠전 톈진지질조사센터 주임

루쑹녠, 전 톈진지질조사센터 주임 수십년간 줄곧 태산의 암석을 연구하는데 진력했다.

루 교수는 태산 암석 견본을 대량 수집했다. 과학적인 연구를 거쳐 그는 태산 위의 암석이 오래되긴 했지만 지표 위로 노출된 시간이 비교적 늦다는 점을 발견했다.

루쑹녠 전 톈진지질조사센터 주임

태산은 4천만년 이후에 융기된 속도가 가장 빨랐습니다. 그러나 융기되기 시작한 것은 6천만년 이전입니다. 융기된 속도가 가장 빠를 때가 4천만년 좌우였습니다.

루 교수에 따르면 약 6천만년 전 지구에 한 차례의 격렬한 판 구조 운동이 일어났다. 태평양판이 유라시아판 쪽을 향해급속도로 하강했으며 거대한 힘에 의해 유라시아판의 변두리가 높이 들리면서 중국 동부에 수많은 명산이 생겨났다.

루쑹녠 전 톈진지질조사센터 주임

지질학자들은 중대한 지질사건으로 보고 있어요. 그러나 지질공원에 종사하는 동료들은 아름다운 풍경을 조성한 아주 중요한 시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황산이나 라오산(崂山) 등은 모두 이 시기에 형성된 것입니다. 신생대 후로 형성된 풍경이지요.

4펑만년 전부터 시작해 태산 지역이 급속히 융기되면서 지하에 매장된 오랜 암석이 지표 위로 노출되었다. 수 천만년의 구조운동으로 인한 변화와 비 바람의 침식으로 결국 태산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게 됐다.

지표에 노출된 시간이 4천만년 밖에 되지 않는데다 지질이 견고한 화강암이 쉽게 풍화되고 침식되지 않기 때문에 28억년 전의 오래된 암석이 현재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보면 태산이 오래면서도 젊은 산임이 확실하다.

옛 사람들은 교통조건의 제한 정해진 활동범위로 인해 태산이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고산이라고 여겼다. 진한시기로부터 명청시기에 이르기까지 선후로 12명의 황제가 태산에서 봉선대전을 진행했으며 수많은 문물고적 시와 글귀를 남겨 세계서도 유일한 봉선문화를 형성했다.

캉쩐 베이징사범대학 문학원 교수

군왕들이 왜 태산으로 봉선의식을 하러 갔냐면요. 태산에 오르면 천하가 작아 보일 뿐만 아니라 하늘 땅과 소통할 수 있고 천지 인간과 신에게 제사를 올릴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봉선 의식과 웅위하고 다채로운 풍경은 역대 문화 명인이 태산에서 시를 짓고 글귀를 남기도록 유혹했으며 이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글귀가 바위에 새겨졌다.

높이가 10여 미터, 너비가 수십미터에 달하는 낭떨어지 위에 100여 개 석각 작품이 새겨져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웅장한 것이 바로 당나라 때의 ‘기태산명’이다. 당현종이 태산에서 봉선 의식을 가진 성대한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태산에서 발견된 가장 오랜 석각 작품은 바로 이 진각석이다. 비문은 진나라 재상인 이사가 쓴 것으로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는 이야기를 기록했는데2천여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세계서 보기 드문 귀한 보물로 불리우고 있다.

30억년의 자연적인 발전 변화 그리고3천여 년의 인류의 보호와 건설을 거쳐 태산 문화의 내포가 갈수록 풍부해지고 있다. 풍경 종교 봉선 건축 인문 문화를 아우르는 태산 문화는 중화민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87년 태산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자연문화 복합유산으로 선정되었다.

태산의 지질과 역사는 ‘명산’으로 되는데 물질과 형태의 기초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훗날의 인문적인 요소야말로 태산이‘오악지존’으로 될 수 있었던 관건이었는데요. 세계유산위원회는 태산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장엄하고 신성한 태산은 2천년간 줄곧 제왕이 조배하는 대상으로 되었으며 산 속의 최고의 인문작품과 자연풍경이 완벽하게 한데 어우러졌습니다. 태산은 줄곧 예술가와 학자의 정신적인 근원이었고 중국 고대의 문명과 신앙의 상징이었습니다.

‘지리•중국’프로를 시청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썽춘입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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