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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다큐]고궁(11) - 국보의 대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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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셀프차이나 작성일14-06-17 19:04 조회5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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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11월 5일은 아주 평범한 날이다.
하지만 이미 퇴위한 말대 황제 푸이에게 있어서는 아주 특수한 날이다.
그는 이날이 자금성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 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퇴위한 뒤로 13년간, 푸이는 이곳을 한번도 떠난 적이 없다.
그는 여전히 내정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곳에 수장된 모든 문물을 포함해서 말이다.
이는 2천년래 봉건 제왕들이 역대로 모아서 얻은 재부로 한번도 끝긴적 없이 이어진 중국의 문명을 모두 아울렀다.
정신먀오 문화부 부부장 고궁박물원 원장: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청궁의 수장품이나 명나라, 청나라 황실의 수장품은 명나라나 청나라 두 조대에서만 모은 것이 아닙니다.
송나라 때부터 궁정에 있는 수장품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런 것도 이어받았습니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왕조의 교체에는 늘 대량의 문물이 잃어지고 파괴되는 현상이 뒤따랐다.
예를 들어 양원제 소역은 황성을 빼앗기기 전에 모든 수장품을 불살라버렸다.
하지만 한 왕조의 승평시기에는 각지로부터 온 문물정품이 모두 궁정으로 집중된다. 이는 문물의 숙명이다.
청나라는 중국의 마지막 봉건왕조로 강건성세를 누리면서 황실의 수장은 전예없는 규모를 이루었다.
이런 문물은 자금성 및 황제의 각 행궁에 보관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황궁은 천하 예술재부의 큰 창고이기도 하다.
그 해 청궁의 수장품이 대체 얼마이고 구체적으로 어느 곳에 보관되어 있었는지 현재 그 누구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현재 볼 수 있는 청나라 궁정에서 편찬한 몇 권의 수장목록도 대부분 그저 서화에 대한 기록에만 국한된 것으로 총 수자는 아니다.
1924년 11월 5일, 푸이가 자금성에 쫓겨났다.
한달 뒤 청실 사후처리위원회에서 내정에 보관된 문물에 대해 조사했다.
조사보고에는 고궁의 문물 가운데서 도자기가 가장 많았는데 대부분 녕수궁, 황국전과 재궁에 보존되어 있었으며 그다음은 서화였는데 종수궁에 가장 많았으며 금기, 은기, 옥기도 여러 궁전에 정도부동하게 수장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푸이가 황궁을 떠난 후의 정경으로 확실한건 이때의 문물이 이미 대량 유실되었다는 점이다.
사실상, 청궁 수장품이 처음으로 대거 유실된 시기는 이보다 60년 전인 1860년이다.
원명원은 청나라 제왕이 150년을 이용해 육속 건설한 하나의 대형 황실 궁정이자 황실 문물을 수장하는 중요한 곳이다.
이것은 그때의 궁정화가 심원, 동대가 그린 ‘원명원40경도’인데 현재 프랑스 파리국가도서관에 수장되어 있다.
현인들은 이로부터 그때의 원명원 모습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불완전통계에 따르면 원명원에 당송 명인의 서화만 200여 폭이 수장되어 있고 문원각은 그때 중국에서 가장 큰 장서루였는데 그중에 수장된 ‘사고전서’만 3만여권이나 된다.
사고전서는 전국에 총 7부밖에 안 된다.
사위성에는 강희 때부터 모은 10만 존의 진귀한 불상이 모셔져 있다.
하지만 수 백년에 거쳐 모은 진귀한 수장품이 며칠내로 자취를 감췄다.
1860년 10월 6일, 영프연합군이 베이징을 공격하고 원명원으로 쳐들어갔다.
이튿날, 미친 듯한 강탈이 시작됐다.
그때 영국 타임지 기자가 자국으로 보내는 통신에서 ‘황제의 궁전으로 들어간 뒤 어느 물건을 가져야 할지 누구도 몰랐다.
금을 가지기 위해 은을 버리고 보석이 삭감된 시계과 보석을 소유하기 위해 또 금을 버렸다.
아주 진귀한 도자기와 법랑채는 너무 커서 운반해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아예 깨버렸다.
그리고 엄청 비싼 서화는 병사들 눈에 그저 폐지나 다름없었으며 지어 담배말이용으로 이용되었다.’고 적었다.
연속 3일간의 약탈을 감행한 뒤 영프연합군은 원명원에 불을 질렀다.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이런 악행을 질책하며 “두 강도가 원명원을 약탈하고 불을 지르고나서 훔친 물건을 나눠 가졌으며 손에 손잡고 웃으면서 유럽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프랑스 퐁텐블로궁, 프랑스 국왕의 행궁에 그때의 나폴레옹 3세가 전문적으로 중국관을 건설했다.
수장품은 전부 중국 황제의 행궁으로 가져온 것으로 영프연합군 최고사령관 몬반리(蒙邦利)의 전리품이다.
여기에 수장된 원명원 문물은 한번도 공식적으로 대외로 공개하지 않았다.
류양 원명원관리처 연구원:
프랑스인이 그때 약탈하고 나서 일부 진귀한 문물이 퐁텐블로으로 운송해 갔잖아요.
장식을 위해 그들은 일부를 파괴하기도 했습니다.
일부 법랑이나 향로의 경우 향로의 덮개를 들어 천장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빼앗은 탕카는 벽지로 사용했구요.
법랑오공은 원명원에서 온 것인데요. 그 위에 서양의 초를 꽂았어요.
그리고 병풍은 전시궤나 진열장으로 개조해 버렸습니다.
하나의 큰 병풍을 파괴한 것이지요.
골동품가게의 골동품과 같은 그런 형식이었습니다.
때문에 물건을 한데 모아놓기만 하고 문물에 대해 분류하지 않았어요.
문물 수량이 엄청났거든요.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은 세계에서 중국 문물을 가장 많이 수장한 박물관이다.
이곳에 수장된 송원명시기의 도자기 수량이 베이징 고궁 버금이라고 한다.
놀랍게도 동방관에 한 점의 ‘여사잠도’가 전시되어 있다.
이는 중국에서 가장 이른 두루마리 그림이다.
비록 수당시기의 모본이긴 하지만 동진 대화가 고개지가 세상에 남긴 얼마 되지 않는 작품이다.
1903년 영군 상위 존이 이 작품을 대영박물관에 팔았다.
이 그림은 중국에 대한 또 다른 한차례의 약탈에서 얻은 것이다.
1900년 음력 8월 28일,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했다.
자금성이 건설되어서부터 처음으로 외래 침략을 받았다.
이는 러시아 관병이 건청궁의 황제 보좌에서 흥미진진하게 남긴 기념사진이다.
그때 여러 나라의 군대가 자금성에서 윤번으로 주둔하고 있었는데 선후로 1년 넘게 지속되었으며 고궁의 문물이 깡그리 약탈되었다.
정신먀오 문화부 부부장 고궁박물원 원장:
청궁의 문서에도 기록이 있어요. 근데 기록이 완전한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문서는 어느 날 군대에서 300여 점을 가져갔다고 기록했습니다.
대체적인 수자만 있지 옥기 등이 대체 얼마나 있었는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상세하기 열거하지 않았습니다.
이같은 대체적인 기록이 많았구요, 정확한 통계는 없었습니다.
중난하이, 고궁의 역사보다도 더 이른 황실 행궁이다. 그때 이곳은 8국 연합군의 총부였다.
이것은 그 해 중난하이의 잉타이에서 약탈해 간 ‘오우도’이다.
당나라 화가 한황의 진적이다.
하지만 현재 세계에 남은 당나라 화가의 진적이 거의 없다.
약탈된 후 다년간 종적을 알 수 없었다.
1951년 나라에서 5만 홍콩달러로 홍콩의 한 경매회에서 사들였다.
8국 연합군의 이번 침략으로 원명원은 전쟁의 화염속에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외의 몇 군데 황실 요지 지어 왕공부저도 약탈당했다.
한림원에 수장된 ‘영락대전’이 소각되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이르고 가장 큰 백과전서이다.
전서는 총 1만 1천권인데 이제는 300여권 밖에 남지 않았다.
그중 170권이 중국에 남고 나머지는 세계 각지의 도서관과 개인의 수중에 분산되어 있다.
고궁 및 문물의 운명은 늘 나라의 운명과 시국의 변화와 함께 했다.
푸이가 자금성에 머물렀던 마지막 몇 년, 작은 조정은 늘 마지막 날같은 혼전속에 빠져있었다.
환관들이 기회를 엿봐 보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당시 지안문 일대에 많은 골동품가게가 문을 열었는데 모두 장사가 잘 되었다.
이런 가게의 배후 주인은 모두 황궁의 환관이었다.
새 중국이 설립된 후 고궁을 청리하면서 여러 곳에서 환관들이 숨겨놓았다가 미처 궁 밖으로 가지고 나가지 못한 진귀한 서화를 발견했다.
그중 중화궁의 무대 아래에서 금나라 대화가 조린의 ‘소릉6준도권’을 발견했다.
산시 당태종 소릉묘의 석각에 따라 그린 것인데 이는 세계에 전해진 조린의 유일한 작품이다.
궁의 문물이 도난당하자 푸이가 크게 화났다.
그는 내무부에 철저하게 조사할 것을 명했다. 하지만 이로 더 큰 화를 불러왔다.
1923년 6월 26일, 도적질한 증거를 없애기 위해 환관이 건복궁에 불을 질렀다.
그 해 건륭 황제가 가경 황제에게 남긴 대부분 수장품이 모두 상자에 넣은채로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번 화재로 얼마나 많은 물건이 타버렸는지 지금까지도 여전한 수수께끼이다.
건복궁에 수천 존에 이르는 금불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화재 후 한 금점에서만 잿더미를 처리하면서 1만 7천냥의 금덩이와 금조각을 주었다고 한다.
건복궁에 큰 불이 일어난 뒤 전 국민의 비난 속에서 푸이가 자금성에서 이사가는 일이 이제는 시간문제였다.
훗날의 생활을 위해 그는 루제에게 상을 준다는 명의로 문물을 궁 밖으로 빼돌리기 시작했다.
사실상 후정에 10여년간 거주하면서 푸이는 제 마음대로 많은 물건을 대신들에게 하사했다.
‘강희재야연도’는 남송 대화가 고굉중의 걸작인데 그 해 푸이가 아무 생각없이 스승인 량딩펀에게 하사했다.
비록 훗날 청궁에 회수되었지만 푸이가 다시 궁 밖으로 가져가면서 민간에 떠돌게 되었다.
새 중국이 설립된 후 국가문물국에서 홍콩으로부터 사들인 후 고궁박물원에 수장하도록 전달했다.
송나라 화가가 고개지를 본떠서 그린 ‘낙신부도’가 그때 궁에 2점이 있었다.
푸이는 그중의 한 점을 스승 주이판에게 하사했다.
훗날 이 작품은 미국에까지 유전되어 워싱턴 프리어갤러리에 수장되었다.
만약 이전에 하사하는 것이 체면을 차리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번에 푸제에 문물을 하사한 것은 완전히 모의가 있는 도적질이었다.
퇴위한 황제로서 그는 직접 물건을 궁 밖으로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에 기회를 만들어 동생 푸제가 궁으로 들어와 함께 공부하도록 했다.
환관이 견직물로 서화, 선본을 잘 포장한 후 푸제에게 넘겨주었고 방과후 궁 밖으로 가져갔다.
이런 도적질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반년넘게 이어졌으며 밖으로 가져간 서화고적은 모두 출중한 정품이었다.
이것은 훗날 청실 사후처리위원회에서 발견한 ‘푸제에게 증정한 명세서’이다.
이로부터 이번 도적행위가 1922년 7월 13일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아낼 수 있다.
처음에는 이부 송원 선본이었고 후에는 역대 명화였는데 총수는 서화첩 68점, 서화 1285점이었다.
그중 11월 초여드레날에만 26점이나 증정했다.
1925년 2월 23일, 자금성에 쫓겨나서 3개월이 지나자 푸이는 베이징을 떠나 톈진 일조계에 있는 ‘장위안’으로 갔다.
그후 이른바 ‘청실 주 톈진 사무처’를 내오고 여전히 작은 조정의 사치하고 화려한 생활을 누렸다.
체면을 세우기 위해 그는 애초 몰래 궁 밖으로 빼돌린 서화를 돈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톈진에서 푸이가 대체 얼마나 많은 서화를 팔았는지 이제는 찾을 길 없다.
하지만 중개인에게 하사한 것만 해도 ‘역대제왕상’, ‘보련도’와 ‘낭원녀선도권’ 등 명작이 있다.
‘낭원녀선도권’은 오대의 화가 완고가 유일하게 남긴 한 점의 작품이다.
세상에 전해진 오대의 인물화가 총 10점도 안 된다.
‘보련도’는 당나라 염입본의 진적으로 당왕조와 토번화친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다.
이 두 점의 작품은 해방후 고궁박물원에 회수되었다.
‘여사감도’처럼 진귀한 ‘역대제왕상’이 톈진으로부터 유출된 후 일본인에게 팔렸다가 2차 세계대전후 미국 보스턴박물관에 수장되었다.
1931년 9월 18일, 9•18사변이 발발했다.
이 해의 11월 10일, 푸이가 살그머니 톈진을 떠나 일본군이 통제하고 있는 창춘으로 갔다.
1932년 3월 9일, 창춘에 있는 위황궁에서 매국조약 ‘일만의정서’를 체결한 후 푸이는 위만주국의 황제로 되었다.
괴뢰 황제로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훔쳐서 궁 밖으로 운송해 간 문물이 톈진으로부터 비밀리에 창춘으로 운송되었으며 ‘소백루’란 창고에 보관되었다.
거의 이와 같은 시기에 새로 건설된 고궁박물원에서 정세가 악화되는 상황아래 문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문물을 남쪽으로 이동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준비는 9•18사변이후부터 조용히 1년 넘게 지속되었다.
고궁의 문물을 남쪽으로 이동시키려던 며칠 전 그때의 원장 비서였던 우잉이 제1진 문물의 호송관으로 지정되었다.
이는 수백년래 이토록 큰 규모의 국보가 처음으로 계획있고 주동적으로 자금성을 떠나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드러냈으며 지어 일부 사람들은 무력으로 남쪽 이동을 막으려 했다.
우환 전 고궁박물원 비서 우잉의 손자:
문물에 대해 모두 공경하면서도 두려워했어요.
오늘에 와서 보아도 문물의 남쪽 이동을 반대하거나 문물의 남쪽 이동을 건의한 사람 모두 좋은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는 충돌이 심했어요.
문물의 남쪽 이동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문물을 이동하면 어디로 운송해 갈지 모른다고 여겼지요.
누구도 보장할 수 없잖아요.
그때는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시기였으니깐요.
이 물건은 어떻게 하겠어요. 국보니까 값이 엄청나잖아요.
이페이지 원장은 그때의 난징정부에 베이징의 상황을 통보했다.
난징정부에서는 나라가 멸망해도 다시 되찾을 날이 있지만 문화가 없어지만 영원히 다시 찾을 수 없다. 고궁의 문물은 즉시 상하이로 운송해야 한다며 백성을 안위했다.
1933년 2월 5일 저녁, 많은 짐수레가 고궁으로 들어왔다.
신무문 광장에서 문물이 집중적으로 차에 실렸으며 오문을 지나 전문 기차역으로 향했다.
고궁 직원이었던 나쯔량이 그날 밤의 정경을 회억하며 “그날은 아주 조용했습니다.
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습니다.
말하는 사람도 없고 노래부르는 사람도 없었으며 쓸쓸한 분위기가 짙었습니다.
이 국보가 언제 다시 운송되어 올지 그 누구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튿날 이른 새벽, 문물을 가득 실은 기차가 전문 기차역을 떠났다.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 최장 시간에 거친 문물 대이동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기차가 핑한선을 따라 정저우고 갔다가 후에 룽하이선으로 고쳐 쉬저우에 도착했으며 다시 톈푸선으로부터 난징의 푸커우에 도착했다.
푸커우에 도착한 뒤 문물을 보관하는 곳에 갑자기 변고가 생겼다.
나쯔량이 농담으로 관재를 들고 와 묘지를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산 91세 전 고궁박물원 비서 우잉의 딸:
문물이 거기에 도착한 뒤로 어디로 운송해 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장찌란 자는 또 시안으로 운송해 가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다른 곳으로 운송해 가라 했어요.
우환 전 고궁박물원 비서 우잉의 손자:
상하이로 운송해 가야 할지 산시로 가야 할지 그때 또 모순되었습니다.
장찌는 산시로 운송해 갈 것을 주장했어요.
그가 산시와의 관계가 좋았고 국민당 상무위원이었기 때문이죠.
쑹즈원은 상하이로 운송해 갈 것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산시는 구체적인 장소가 없었고 상하이의 쑹즈원도 구체적인 곳을 배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국보를 어디로 운송해 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때 총 호송관 우잉이 난징정부를 찾아다니며 지시를 요청했다.
그는 지어 그때 난징정부의 주석이었던 린썬도 찾았지만 결론적으로 아무런 결과도 없었다.
우환 전 고궁박물원 비서 우잉의 손자:
쑹즈원이 또 출장갔습니다.
양썬은 왜 이렇게 빨리 운송해 왔는가고 물었지요.
결과 우잉은 국민정부에서 호송해 오라해서 온 것인데 어디로 운송해 가야 하는지 그쪽에서 곳을 마련해 줘야 되지 않겠는가고 말했습니다.
반달 후 쑹즈원이 상하이로 출장갔다가 돌아와 임시 회의를 소집했다.
논의를 거쳐 3월 중순이 되어서야 정부는 문헌기록을 난징에 남기기로 하고 나머지는 상하이로 운송해 가기로 결정했다.
그후 3개월동안, 또 문물이 네번이나 상하이로 운송되어 프랑스 조계 천주교회당의 창고에 보관되었다.
이런 문물은 고궁과 고물진열소 등 곳에서 온 것인데 총 1만 9천 여 상자나 된다.
그중 고궁의 문물만 1만 3천여 상자였다.
서방 조계의 보호아래 동방의 국보가 이곳에서 무사하게 4년이란 시간을 지냈다.
1936년 9월 26일, 고궁박물원이 난징의 창고에서 낙성되었다.
그후로 고궁박물원의 난징분원이 설립되고 이때 마헝이 이페이지를 대체해 고궁박물원 원장직을 맡았으며 훗날의 문물 남쪽이동을 책임졌다.
그 해 상하이에 보관한 문물이 육속 난징으로 운송되었다.
하지만 국보가 이곳에 반년 보관되었다가 다시 이전해야 했을지 누구 생각이나 했으랴!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사건이 발발했으며 일본군이 중국으로 전면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했다.
8월 13일, 일본군이 상하이를 폭격하자 난징이 아주 위험해졌다.
이때의 난징정부는 고궁박물원에서 난징에 보관한 문물을 즉시 대 후방으로 옮길 것을 명했다.
남로의 문물 80여 상자가 수로에서 육로로 바꿔 창사로 운송해갔다.
중로 문물 9천 여 상자는 수로를 거쳐 그때 제2의 수도인 충칭으로 운송해갔다.
북로의 문물 7천 여 상자는 운송해 왔을 때의 노선을 따라 정저우를 거쳐 바오지로 운송해갔다.
남로의 문물이 맨 먼저 운송되어 가고 중로와 북로의 문물이 함께 운송될 때 일본군이 이미 상하이를 점령하고 난징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중로의 문물이 마지막 한 진만 남았을 때 부두에는 이미 중국 선박이 없었다.
긴박한 상황아래 호송관 뉴더밍이 한 척의 영국배와 긴급하게 교섭했다.
마지막 순간에야 대방에서 남은 문물을 한커우로 운송해 가는 것을 허락했다.
뉴천 중로 남쪽이동 문물 호송관 뉴더밍의 아들:
피난한 것이죠. 도망치지 않으면 폭격당하고 파괴되잖아요.
그렇잖아요. 아니면 일본인에게 던져 주는 꼴이 되구요.
그렇죠. 모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일본인에게 던져줄 수 없으니 빨리 운송해 간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하겠어요? 나라가 약하니 할 수 없죠.
중로의 문물은 1년 후 충칭에 도착했다.
충칭이 폭격당할 때 긴급하게 러산의 안구향으로 대피되었으며 다행히 재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북로의 문물은 일본군이 진공하는 방향을 따라 운송되었는데 과정이 중로보다 훨씬 아슬아슬했다.
문물을 운송하는 기차가 정저우에 도착하자 마자 적기의 폭격을 당했다.
량쾅중 북로 문물 호송관 량팅웨이의 아들 전 고궁 직원:
문물을 호송하는게 좋은 일은 아닙니다.
문물이 폭경당하면 호송하던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하니깐요.
양심적으로 책임질 방법도 없잖아요.
폭탄을 안아 내려오지 못하게 할 수도 없는 일이구요. 안 되잖아요.
결과적으로는 다친 사람도 없고 문물도 파괴되지 않습니다. 얻은 셈이죠.
줄곧 바오지까지 따라갔습니다.
모든 문물이 운송되기 시작한지 열흘이 지나자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고 유례 없이 참혹한 난징대학살을 저질렀다.
난로의 문물이 창사에 도착한 뒤 잠시 후난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그때 웨루산 아이완팅 부근의 산에 동굴을 파고 문물을 저장하려 했다.
하지만 착공하기도 전에 일본군이 창사를 폭격하기 시작했으며 1년도 되지 않아 문물은 다시 운송해 가야 했다.
일주일 후 원래 국보를 보관했던 후난대학 도서관이 평지로 되어버렸으며 아이완팅도 폭격당했다.
남로의 문물이 요행 재난을 피하고는 정처없이 돌아다니다가 결국 구이저우의 안순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화옌둥이라는 종유동에 보관되었는데 6년이나 지속되었다.
훗날 그때의 쓰촨 파현에 운송되었다.
북로의 문물이 운명이 더욱 기구했다.
바오지에 도착한지 3달도 되지 않아 바오지가 또 적기의 폭경을 당했으며 문물을 다시 서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량쾅중 북로 문물 호송관 량팅웨이의 아들 전 고궁 직원:
그때는 정말로 피난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도망을 치면 후에서 일본 항공기가 쫓아왔거든요.
이상하게도 우리가 한 발 대디디기만 하면 인츰 폭경을 했어요.
그때는 소식이 그토록 빠를 수가 없었어요.
그들이 빠른게 아니라 우리가 빨랐거든요.
왜 이렇게 얘기하냐면요?
우리가 물건을 다 옮겨 간 다음에 폭격했으니깐요.
북로의 문물이 적기의 폭격에서 벗어나 친링을 넘기 시작했다.
나쯔량이 그때의 정경을 회역하며 “차를 운전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도로를 꽉 막았다.
차 바퀴에는 철사슬을 동여매고 달렸는데 모두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무한한 왕복을 거쳐 1년 넘게 북로의 문물이 한중, 청두를 거쳐 결국 쓰촨의 어메이로 운송돼 갔다.
어메이에서 고궁박물원은 주 어메이 판사처를 설립했다.
량쾅중 북로 문물 호송관 량팅웨이의 아들 전 고궁 직원:
사실 고궁의 물건은 모두 진귀한 것이었습니다.
모두 안 속을 챙기지 않고 자신을 위해 문물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경보가 있던지 없던지 그리고 일이 있던지 없던지를 막론하고 모두 먼저 집에 가지 않고 창고로 갔습니다.
그 해 고물을 보관했던 대포사는 이미 없어져 버리고 문어구의 대용수만이 여전히 거기에 우뚝 솟아 그 해 일어난 이야기를 입증하고 있다.
이로부터 그 해 고궁으로부터 운송해 나온 1만 3천 여 상자의 문물이 아주 조금만 난징에 남긴 외 나머지는 모두 안전하게 대 후방으로 옮겼다.
고궁박물원의 사업일군은 5년 넘게 이 국보들을 가지고 중국의 절반을 돌아다녔지만 그 과정에서 한 점의 문물을 잃어버리거나 파손되는 일이 없었다.
이는 세계 문물역사에서의 기적이다.
문물이 서쪽으로 어렵게 옮겨지고 있을 때 일본인이 고궁으로 쳐들어갔다.
관련 자료를 보면 일본인이 연대를 알 수 없는 동 항아리 66개, 동 대포 4문, 동등정 91개를 톈진으로 옮겨가 제련함으로써 살인하는 무기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항일전쟁 승리 후 대부분을 되찾았다.
불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 위에 빼곡하게 생긴 긁힌 자국이 보이나요?
보았습니다.
1938년 일본놈들이 자금성을 침략할 때 칼로 끍은 것인데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그 위에 있는 동 소태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푸이는 항일전쟁이 일어난 몇 년간 줄곧 창춘의 위황궁에 거주했다.
1945년 8월 8일, 쏘련 홍군이 중국 동북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일본인의 괴뢰였던 푸이는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음을 직감하고 샤오바이러우에서 120여 점의 서화와 일부 보석만 챙기고 황급히 일본으로 도망치려 했다.
3일 후, 푸이가 선양공항에서 쏘련 홍군에 잡혔으며 그 문물은 후에 현재 랴오닝박물원의 전신인 동북박물원에 넘겨졌다.
현재 랴오닝박물원에 수장된 푸이가 가져간 문물 수량이 고궁 버금으로 간다.
그중 당나라 인 주방의 ‘잠화사녀도’와 구양순의 ‘몽전첩’은 모두 세상에서 드문 진품인데 랴오닝박물원에서 가장 진귀한 보배로 불리우고 있다.
푸이가 황궁을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샤오바이러우에 남긴 채 미처 가져가지 못한 대량이 문물이 문지기 위병의 강탈을 당했다.
수많은 서화가 강탈과정에서 파괴되었으며 나머지는 사처로 분산된 병사들에 의해 민간으로 흩어졌다.
북송 화가 이공린이 세상에 전해진 작품이 3점 밖에 없는데 ‘오마도’, ‘임위언목방도’와 ‘삼마도’이다.
그중 ‘삼마도’는 이번 강탈에서 산산조각으로 찢어졌다.
베이징 유리창은 건륭 연간에 저명한 문화쇼핑거리로 되었다.
항일전쟁 승리후 유리창은 한동안 이상한 번영기를 맞이했다.
그 해 샤오바이러우에서 약탈된 대량의 서화가 이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골동품 상인들은 이를 동북물건이라 불렀다.
이것은 남송 대화가 이당이 그린 ‘진문공복국도’인데 유리창의 수장가가 구입해 간 뒤로 미국 뉴옥 메츠박물원에 증정했다.
고증결과 미국에 적어도 6곳의 박물관에 동북물건이 수장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중 뉴욕 메츠박물원에 가장 많은데 총 430여 점이나 된다.
푸이가 가져 간 문물이 도처로 돌아다닐 때 그 해 서쪽 대 후방으로 옮긴 3로의 고궁 문물이 육속 난징으로 운송돼 갔다.
새 중국 설립되기 전, 장제스가 난징에 보관해 둔 고궁에서 남쪽으로 이동한 문물을 타이완으로 옮기라는 명을 내렸다.
1948년 12월 22일부터 1949년 2월까지 총 2972상자에 달하는 문물이 타이완으로 운송돼 갔다.
비록 고궁에서 남쪽으로 이동한 문물의 4분의 1밖에 안 되지만 모두 선별해 낸 최고의 정품들이었다.
그 해 고궁에서 운송되어 나간 문물이 이때부터 해협 양안에 나뉘어 수장되었으며 그 해 국보를 호송했던 사람들이 고궁을 떠난 뒤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량쾅중 북로 문물 호송관 량팅웨이의 아들 전 고궁 직원:
그는 요행을 바란면서 그렇게 몇년을 지낸거죠.
몇년이면 괜찮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결국에는 몇년, 수십년이 지났습니다.
그가 그렇게 오래동안 돌아오지 않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어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누구한테도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조모가 돌아갈 때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더 돌아올 수 없게 됐습니다.
해방 초기의 고궁은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시기였다.
나라의 지지아래 난징에 보관된 고궁 문물이 육속 다시 고궁으로 운송되어 왔다.
정신먀오 문화부 부부장 고궁박물원 원장:
장제스가 일부분을 가져갔지만 새롭게 생긴 인민정권은 고궁을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품의 보물고로 다시 회복할 능력도 결심도 있었거든요.
1952년 나라에서 정책을 내오고 유리창을 중심으로 전국 범위내에서 그 해 고궁에서 유실된 문물을 모으기 시작했다.
아울러 전국의 여러 박물관으로부터 고궁박물원으로 조달하며 고궁의 수장을 풍부히 했다.
그 해 여기저기로 분산되었던 문물 예를 들어 ‘청명상하도’ 등이 다시 고궁으로 돌아왔다.
이런 문물 대다수는 개의의 무상 증정에서 얻은 것이다.
현재의 경인궁의 한쪽 벽에 오랜 세월동안 고궁에 문물을 기부한 인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가 바로 경인방이다.
대수장가 장보주의 이름이 뚜렷하게 씌여있다.
그가 수장한 동진 육기의 ‘평복첩’은 공인하는 가장 이른 두루마리서화 작품인데 묵황이라 부른다.
그 해 일본인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장보주는 몸에 꼭 붙는 옷에 기워넣고 종일 입고 다녔다.
해방 후 그는 이 작품과 다른 7점의 진품을 함께 고궁박물원에 증정했다.
건국 초기의 1951년, 공화국 경제가 아직 아주 낙후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총리의 지시에 따라 나라에서 48만원에 달하는 외화를 들여 홍콩으로부터 ‘백원첩’, ‘중추첩’을 사들였는데 바로 고궁의 삼희당에 보관되어 있는 두가지 보배이다.
그후 고궁은 해외로 유실된 문물에 대한 모집은 한번도 끝기지 않았다.
1995년, 고궁박물원은 1천 8백만위안으로 북송 장선의 ‘십영도’를, 2003년에는 2천 2백만위안으로 수인서 ‘출사송’을 사들였는데 이는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이른 서화작품이다.
정신먀오 문화부 부부장 고궁박물원 원장:
전에 이런 물건이 모두 해외로 유실되었습니다.
지금은 해외에 있는 중국의 물건을 다시 돌아오는 셈입니다.
아주 중요한 일인만큼 우리는 이 상황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나라의 실력이 커졌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반영하니깐요.
불완전통계에 따르면 50여년간 고궁에 새로 수장된 문물이 24만점에 달한다.
고궁은 150만점의 수장품으로 중화 정신적 재부와 인류 예술 결정의 보물고로 떠올랐다.
하나의 궁전 그리고 궁전에 수장된 진귀한 보배는 수 천년에 이르는 문명의 전승과 수 백년의 풍운변화를 담고 있다.
오늘날 고궁 문물의 모습이 세계 각지에 널려있다.
문물마다 뒷면에 쓰라리거나 기이하거나 굴곡적인 이야기가 숨어있다.
그들의 운명의 궤적은 한 나라, 몇 개 조대의 흥망성쇠의 역사적 종적을 표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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