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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다큐]고궁(10)- 황궁이 박물원으로 개조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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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셀프차이나 작성일14-05-12 15:53 조회5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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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10월 10일, 이날 3천 여명의 중요한 인물들이 자금성 건청문광장에 모였다.
또한 2만 여명을 넘는 백성들이 이곳으로 왔다.
이날 신무문의 문동에 고궁박물원이란 현판이 걸렸다.
이날 여기서 고궁박물원 현판식이 열렸다.
자금성에서 고궁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오늘부터 이곳이 더는 황궁이 아니라 하나의 박물원으로 되었음을 의미한다.
오랜 세월동안 지켜온 금지구역이 공식적으로 대외 개방되었다.
수천수만에 이르는 일반 민중이 그제날 신비함에 가려졌던 황실 궁전으로 직접 들어가볼 수 있게 되었다.
양신(杨新) 전 고궁박물원 부원장:
전에는 경계가 심했어요.
백성은 성벽변두리에도 접근할수 없었어요.
지금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쉬치셴(徐启宪) 고궁박물원 연구원:
조건만 된다면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 보고 싶어요.
뤄쒜이주(罗随祖) 고궁박물원 부연구관원:
그때 어떤 사람들은 죽기전에 고궁으로 들어가 보면 한이 없겠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류청푸(刘曾富) 93세 베이징 주민:
저는 시계를 봤어요.
여러가지 종류의 시계들이죠.
그리고 또 뭘 봤냐면, 그들이 보는 도자기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우산(吴珊 ) 21세 전 황실사후처리위원회 고문 우잉 장녀:
지금 기억하기로 설립되고나서 그때 참관하러 갔을 때 요일마다 가는 곳이 달랐어요.
많은 사람들이 고궁을 참관하는 것은 황실 궁정 생활이 신비롭기 때문에 구경하러 온 것이지요.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황실의 서화 수장품을 직접 보고 비결을 알기 위해 전문 오기도 했어요.
치궁93세 저명한 서법가:
우선 선생님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리고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가르쳐 주었어요.
사흘동안 저에건 수확이 컸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재미거리밖에 안 되었지요.
우리처럼 특별히 그림을 배우러 온 사람들에게는 하늘에서 떨어진 보배나 다름없었습니다.
이것은 한 단락 역사의 결속이자 한 단락 역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필연적인 과정에서 유심하든 무심하든 주동적이든 피동적이든지를 막론하고 일부 사람들이 역사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은 이미 운명으로 정해졌다.
고궁에 관한 가장 이른 영상은 클린턴•시몬스란 미국인이 1903년에 촬영한 것이다.
5년 후 아이신줴뤄•푸이가 이곳에서 황위에 올랐다.
그리고 3년 후 신해혁명이 발발했다.
1912년 1월 6일, 푸이가 양심전 동난각에서 룽위 태후가 방구들에 앉아 눈물을 닦고 있으며 그 앞에 무릎을 꿇은 늙은 신하의 얼굴에 눈물자국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
푸이는 그 늙은 신하가 바로 위안스카이이고 멀지않은 훗날 며칠간 황제가 되었던 사람이란 걸 몰랐다.
그는 직접 룽위 태후에게 퇴위청구를 올렸다.
한달 뒤 룽위 태후가 양심전에서 퇴위조서를 반포했다.
6살 난 푸이는 얼떨결에 3년간 황제노릇을 하다가 또 얼떨결에 퇴위했다.
자금성의 옛 사진은 푸이가 퇴위하기 전후의 시기에 찍은 것이다.
평화적으로 퇴위하는 교환조건으로 그들은 그때의 민국정부와 ‘청실우대조건’를 체결했다.
이 조건은 퇴위한 황실이 자금성 후궁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하고 황제의 존호를 그대로 보류하는 외 해마다 정부에서 그들에게 4백만위안의 생활비를 지불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대 황제 푸이는 한 왕조의 통치자로부터 작은 조정의 주인으로 되었다.
이것이 바로 청실 퇴위후 룽위 태후가 각 부에 하달한 조서 원본이다.
말대 황제 푸이를 위수로 퇴위한 청나라 황실은 자금성 내정에 거주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그때 자금성은 건청문을 계선으로 두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건청문 이남은 민국정부의 소유로 되고 건청문 이북 즉 원래의 후궁구역은 퇴위한 황실에서 거주했다.
한 궁전에 2개 조대가 병존하고 있다.
이는 수백년간, 자금성에서 전에없는 특수한 시기이다.
이 때문에 민국시기의 베이징성에 ‘나라 속의 나라’란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궈푸뤄•룬치 93세 말대 황후 완룽의 친동생:
그때 푸이는 어렸어요. 17, 18살였지요. 어렸기 때문에 아이들과 놀기를 좋아했어요.
궈푸뤄•룬치는 말대 황후 완룽의 친동생이다.
이 노인은 현재까지도 입궁한 후 일곱살이나 더 큰 푸이와 놀던 정경을 기억하고 있었다.
궈푸뤄•룬치 말대 황후 완룽의 친동생:
어머니도 집에서 자전건을 탔어요. 저도 자전거타는 걸 배웠구요.
후에 푸이한테 가져간 적 있는데요. 푸이는 자건거를 많이 샀어요.
그리고 모두 자전거 타는 걸 배웠지요.
완룽도 배웠어요. 사진도 있는데요. 완룽도 탈 줄 알았어요.
이것이 바로 푸이가 그해 자건거를 타기 위해 끊어버린 문턱입니다.
쉬치시앤 고궁박물원 연구원:
푸이에게는 그저 궁내의 작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죠. 나갈 수 없었으니깐요.
쟈잉화 만청사연구학자 ‘말대 황제의 후반생’작자:
푸이가 후반생에 이런 말을 했댔어요.
“난 이 평생 높은 담을 보면서 살았습니다. 궁에서 태어나니 왕부였고 3살에 궁으로 들어와 황제로 되었습니다. 한 눈에 높은 담만 보였는데 바로 자금성의 높은 담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금성을 한 발자국도 떠날 수 없었던 푸이는 자유를 동경했다.
이제 높은 궁성도 바깥 세상과의 연계를 끊어놓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중국 제1역사문서관에서 그해 푸이가 궁에서 열독했던 신문을 찾아냈다.
이런 신문과 잡지는 은연중에 푸이를 얼마나 변화시켰느지 모른다.
영국 스승 레지널드 존스턴때문이었는지 푸이는 다양한 서방 생활방식의 영향을 받았다.
푸이는 자서전 ‘나의 전반생’에서 ‘나의 영어 스승 레지널드 존스턴이 입궁해서부터 난 다른 사람들 안중에 가장 대처하기 어려운 황제로 되었다.
난 머리채를 잘라버렸다. 레지널드 존스턴이 중국인의 머리채가 돼지꼬리와 같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태비, 대신들은 화가 나 어쩔줄 몰라했다. 스승들은 전화를 설치하면 누구나 황제와 얘기할 수 있는데 이는 선조 때로부터 전에없는 일이라고 말렸지만 난 고집대로 양심전 동난각에 전화를 설치했다.’고 적었다.
쟈잉화 만청사연구학자 ‘말대 황제의 후반생’작자:
전화가 생기면서 그는 새장속의 새가 외계와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여겼어요. 그래서 여기저기로 전화를 했답니다.
양톈쓰(杨天石)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 연구원:
마구 누르다가 어느 한번은 후쓰(胡适)에게까지 전화가 걸렸다고 합니다.
쟈잉화 만청사연구학자 ‘말대 황제의 후반생’작자:
그가 후쓰에게 전화를 걸 때 후쓰는 깜짝 놀랐대요.
자기가 누군지도 밝히지도 않고 그저 당신이 후쓰인가로 물었대요.
후쓰가 그렇다고 하면서 누군가고 묻자 알아맞춰 보라고 했답니다.
모르겠다고 하자 푸이는 깔깔 웃으면서 난 선통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스스로 제왕의 지위에 서고 태화전의 보좌에 올라 앉았으며 외조 3대 전 편액에 쓴 만족어를 지우라고 명했다.
청나라 황실은 불안해져 황궁을 양보하고 의화원으로 옮길 준비를 했다.
청나라 오랜 신하였던 위안스카이는 그들을 안위하며 ‘청실우대조건’을 영원히 개변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짧은 83일동안 2명의 황제가 하나의 황궁에 있으면서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겨우 1년이 지난 뒤인 1917년, 장쉰(张勋)이 복위하면서 푸이가 건청궁에서 12일간 황제로 있다가 또 총망히 보위에서 내려왔다.
정권이 교체되면서 사람들은 정신없이 깃발을 갈았다.
많은 백성은 아예 공화기, 용기를 모두 갖춰두고 수시로 일어나는 변동을 대응했다.
아울러 민주와 과학의 진보사상이 이미 널리 전파되었다.
한차례의 심각하고 거대한 변혁이 20세기 초의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바깥 세상의 경미한 변화는 자금성에서 적잖은 파란을 불러왔다.
푸이는 ‘황실우대조건’ 그리고 위안스카이의 승낙은 이미 의지할 바가 못되고 청나라 조정이 향유하는 우대도 끝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하지만 이 날도 점차 가까워졌다.
궁에서 나간 후 살길을 남겨두기 위해 푸이는 증정의 명의로 동생 푸제더러 궁의 수장품을 조금씩 궁 밖으로 옮겨가라고 했다.
푸이도 이렇게 불안해 하는데 궁내는 인심이 흉흉한지 오래다.
사람마다 자신의 앞길과 앞날의 생계를 위해 계산하고 있었다.
이때 영어 스승 레지널드 존스턴은 푸이에게 “베이징 지안먼내의 얜다이세가에 많은 골동품가게가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알아보니 이 골동품가게의 주인이 모두 궁의 환관들이었습니다”고 알려줬다. 푸이는 그제야 사실의 심각성을 느꼈다.
푸롄중 전 고궁박물원 관원:
이런 일이 일어나고 나니 푸이도 생각하게 되었지요.
궁의 환관들이 골동품가게를 차리고 있잖아요.
물건이 다 어디서 왔겠어요. 모두 궁의 것이잖아요.
자금성에서 그때 보물을 가장 많이 수장한 곳이 바로 건복궁이다.
푸이는 16살 되던 해 어느날 호기심에 환관더러 창고문을 열라 했다.
천정까지 쌓인 큰 상자가 온 방을 꽉 채우고 있었는데 아무 상자를 열어도 모두 두루마리서화와 아주 정교한 옥기가 들어있었다.
이런 것들은 건륭 황제가 가장 좋아하는 진귀한 장난감이었다.
푸이는 그때 자금성을 이렇게 묘사했다.
자금성이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질서는 엉망진창이다.
난 대체 돈과 보물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이런 것들은 정확한 수자가 없다보니 도적놈들에게 편리를 제공한 셈이다.
양신 전 고궁박물원 부원장:
푸의 스스로도 이런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때 명을 내려 궁에 있는 수장품을 철저하게 조사하기로 했지요.
푸롄중 전 고궁박물원 관원:
그가 조사하기도 전에 소식이 퍼지면서 일이 떠졌어요. 조사하기 전에 불이 났던거죠.
화재는 동교민항에 있는 이탈리사 공사관 소방대에서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소방차가 자금성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을 때 문지기는 무슨 영문인지조차 몰랐다.
결국 건복궁 일대는 까맣게 타버렸다.
그때의 화재로 얼마나 많은 물건이 타버렸는지 지금까지 수수께기로 남아있다.
리지 고궁박물원 상무 부원장:
물론 건복궁사건은 도화선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 사건은 그때 푸이 조정에 아주 불리했고 전국적으로 대중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만은 확실합니다.
우리는 오늘에도 푸이가 생활한 원 모습에 대한 전시를 통해 그가 그해 궁에서 생활하던 정경을 보아낼 수 있다.
1912년부터 1924년까지 퇴위한 황실은 자금성에서 장장 13년이나 거주했다.
‘청실우대조건’에서 제기한 훗날 거처를 옮기는 일을 민국건립 때부터 역대 대통령 모두 성사시키지 못했다.
역사는 결국 이런 기회를 펑위샹(冯玉祥)장군에게 남겨주었다.
1924년 겨울, 자금성 내정에 갑자기 30여명의 병사, 경찰이 들이닥쳤다.
그중 우두머리 셋은 각각 신임 경기위수 총사령 루중린(鹿钟麟), 경사경찰청 총감 장비(张壁)와 국민대표 리위잉(李煜瀛)이었다.
그들이 내무부 총관대신 사오잉(绍英) 등 자를 만나자 수정한 황실우대조건을 내밀며 퇴위한 황제가 즉시 궁에서 나갈 것을 명령했다.
이때 푸이는 저수궁에서 완룽과 함께 사과를 먹고 있었다.
갑작스런 변고로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한달 아니 열흘 지어 3일만이라도 미루었다 이주하게 사정을 봐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몇번의 교섭끝에 루중린은 만약 더 미룰 경우 경산 위에서 포를 쏘겠다고 위협했다.
푸이 등은 황급히 저수궁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황실도 영원히 자금성과 작별했다.
신문 보세요. 신문 보세요.
펑위샹이 푸이를 황궁에서 쫓아냈습니다.
신문 보세요. 신문 보세요.
신문 보세요. 신문 보세요.
이 두 장의 사진은 그 해 푸이와 환관 궁녀들이 출궁했을 때 찍은 것이다.
이튿날, 루중린, 리위잉 등 일행은 어새가 놓여있는 교태전으로 갔다.
그들이 우선 조사 확인한 것은 황권을 상징하는 어새였다.
문물사업자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그때 조사하던 정경을 재현했다.
그제날 지고무상하던 어새가 높이 보좌 양켠에 나뉘어 진열되었다.
사람들은 목록에 따라 하나씩 검증했는데 총 23개 어새를 집계해냈다.
이 어새들은 오늘날까지도 고궁박물원에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군주제가 여기까지 와서 마침내 막을 내렸다.
베이징성 곳곳에서 폭죽소리가 들려왔다.
그 해 8살이었고 이미 배우로 성장한 쑹바오뤄는 아직도 풍위샹 장군의 축하연을 위해 공연하던 정경을 기억하고 있었다.
쑹바오뤄89세 경극 배우:
그 축하연에 몇만에 이르는 부대에서 공연을 관람했는데요.
관중이 정말 많았어요.
그때 펑위샹은 회색 솜바지와 솜옷을 입고 있었구요.
그의 아내 리더취안은 저에게 2개 대양을 주었어요.
펑위샹은 저에게 낙화생을 한줌 주더군요. 그때는 모두 즐거웠습니다.
황제가 떠났다. 황궁은 여전하다. 하지만 황궁이 대체 어떠 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1924년 11월 20일, 청실 사후처리위원회가 공식 설립되고 리위잉이 위원장을 맡았다.
리위잉은 만청 중신 리훙자오의 아들로 푸이가 궁에서 쫓겨날 때 국민대표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차이위안페이, 천위안, 선지앤쓰, 루중린, 장비, 위퉁쿠이 등 사회문화 명류가 위원직을 맡았다.
위원회의 직책은 청궁의 공적인 재산과 사적인 재산을 확정짓고 모든 사후사항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중국 역사에서 역대 왕조 모두 문물을 수장하는 전통이 있었다.
한 왕조가 멸망한 후 새로운 왕조가 그것을 본조의 소유로 수장하곤 했다.
때문에 청실 사후처리회는 청궁에 있는 역대 궁정에서 전해진 보배는 모두 백성에게 돌려줘야 하는외 민국정부의 소유로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우잉(吴瀛), 푸이가 출궁하던 그 해 33살이었다.
그때 북양정부 내무부 경정사 제3과 과장직을 맡았으며 주로 퇴위한 황제인 푸이와 청궁사무의 감독관리를 책임졌다.
푸이가 출궁한 뒤 청실 사후처리위원회 이페이지의 초빙으로 고궁 고문직을 맡았다.
우잉의 큰 딸은 아버지나 이페이지가 고궁에 대한 열정은 모두 중국 전통 전장문물에 대한 애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우산(吴珊) 91세 청실사후처리위원회 고문:
골등품을 모두 좋아했어요.
그래서 베이징에 오기만 하면 유리창을 돌아보곤 했지요.
그들은 함께 이런 것을 보러 가기도 하고 사러 가기도 했는데요.
제가 알기로는 주일마다 유리창으로 갔습니다.
청실 사후처리위원회에서 조사하려 할 때 시국에 또 변동이 생겼다.
봉계 장쭤린(张作霖)이 군을 이끌고 베이징으로 쳐들어왔으며 돤치뤠이(段祺瑞)가 임시로 정권을 잡았다.
펑위샹이 사직했다. 이튿날 퇴위한 청나라 황실 인원은 즉시 나서 “수정한 모든 청실 우대조건이 유효하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성명했다.
푸이도 출궁할 때 강제 서명을 했다는 성명을 신문에 게재했다.
사후처리위원회가 11월 22일로 정한 조사확인예비회를 어쩔 수 없이 중지해야 했다.
푸이의 동생 푸런 87세:
아버지는 일을 크게 만들지 말라고 타일렀죠.
좋은 결과가 없을 것이라 했지만 그는 듣기 싫어했습니다.
푸이는 늘 꿈을 꿨는데 사실 모두 헛튼 생각이었지요.
장훙웨이(章宏伟) 자금성출판사 부사장:
사실 그들은 우선 궁으로 돌아올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첫번째 희망이었구요.
두번째는 궁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라도 물건을 조금이라도 가져가고 싶어했습니다.
장보펑(章伯锋)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 연구원:
이 일은 돤치뤠이의 지지를 받았어요.
돤치뤠이가 그때 내정부와 경찰청에 명을 내렸던 것입니다.
장훙웨이(章宏伟) 자금성출판사 부사장:
청실 사후처리위원회에서 청궁에 있는 물품을 하나하나 조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좡윈콴(庄蕴宽)이 선뜻 나섰다.
그때 위안스카이가 황제로 있을 때 전국 위원 60명중 59명의 지지를 받았다.
유일하게 그만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해 나섰는데 이 때문에 아주 높은 사회적 명성을 얻었다.
훗날 민국정부에 의해 민국 회계감사원장으로 위임되었으며 사후처리에도 참여했다.
좡윈콴은 돤치뤠이로부터 청실 사후처리위원회와 이페이지 등 사람을 힘껏 보호했다.
우환(吴欢) 청실 사후처리위원회 고문 우잉의 손자:
돤치뤠이는 청원서를 허락했습니다.
청원서를 허락했다는건 법률적으로 청실 사후처리위원회의 존재를 인정한 뜻이죠.
리쓰청(李石曾) 등 자들은 합리적이고 합법적으로 베이징대학 학자를 이끌고 고궁으로 들어갔습니다.
1924년 11월 24일, 사후처리회가 리위잉이 인솔아래 공식적으로 하나씩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건청궁으로부터 착수했다.
그때 조사하던 정경을 더욱 직관적으로 전시하기 위해 2005년 4월, 우리는 제자리에서 재현했다.
그때의 규정에 따라 매 궁전의 물품은 천자문 순서를 기준으로 한 글자를 지어낸 후 차례대로 번호를 매겼다.
건청궁은 첫번째로 조사에 들어갔기 때문에 ‘천’자로 편성되었다.
그들은 가장 먼저 나무걸상을 봤다.
그래서 기록하고 나서 천자 제1호 문물로 지정했는데 이 일은 훗날 웃음거리로 전해졌다.
그들중 대다수는 호기심을 가지고 처음 궁전으로 간 사람들이다.
그날의 조사업무가 이 몇장의 사진에 기록되었다.
인파 속에는 베이징 사학과 학생이 있었는데 19세로 이름은 싼쓰위안(单士元)이었다.
32년 후 그는 고궁박물원의 부원장으로 되었다.
싼자준(单嘉筠) 싼쓰위안의 딸:
마침 촬영위원도 거기 있었는데 싼쓰위안, 당신에게 사진을 찍어주지라면서 마고자를 입고 찍자고 했대요.
스스로도 멍한 게 마치 골샌님과 같아 볼품이 없다고 적은 적도 있습니다.
그때 고궁에서 조사에 참여한 사람에 대해서는 요구가 아주 엄했다.
싼자준(单嘉筠) 싼쓰위안의 딸:
우선 두개의 고비가 있었는데요. 즉 두개의 기준이 있었어요.
푸롄중(傅连仲) 전 고궁박물원 관원:
하나는 가게보증 이었습니다. 고궁 문에 들어서려면 3호가 가게보증을 서야 했습니다.
싼자준(单嘉筠) 싼쓰위안의 딸:
절도를 하거나 법도를 어기는 행위가 있을 때 책임을 져야 하고 그자를 대신해 돈을 갚아야 했습니다. 또 하나는 사람이 보증을 서는 것이었습니다.
푸롄중(傅连仲) 전 고궁박물원 관원:
아무 일이 없도록 보증해야 했습니다.
물건을 훔치면 절대 안 되었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조차 밖으로 가져가서는 안 됐습니다.
그때 궁에서 조사하는 것을 ‘출조’라 하고 일을 마친 것을 ‘퇴조’라 했다.
출조할 때 모두 한 곳에서 업무를 처리해야 하고 단독적으로 움직이면 안 되었다.
조사초기는 한겨울이었지만 궁에는 불을 짚일 수 없었다.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그들은 끈으로 소매를 꽉 동여맸기 때문에 두 손은 아무리 추워도 넣을 곳이 없었다.
어떤 때는 서서 조사하곤 하는데 한번 서면 3~4시간은 족히 걸렸다.
먹통의 먹, 붓은 끝부분이 얼어서 얼음으로 되어버리기 일쑤였다.
조사업무는 바로 이토록 악렬한 조건에서 긴장하고도 질서있게 진행되었다.
리원루(李文儒) 고궁박물원 부원장: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그 사람들의 문화사명감과 문화유산을 보호하려는 책임감이 우리 보다 훨씬 더 강했던것 같아요.
사후처리위원회는 본받을만한 아무런 경험도 없는 상황에서 일련의 엄격한 제도를 내왔다.
한 차례의 조사가 진행될 때마다 명단에는 팀장과 팀원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이런 구체적인 업무에는 물품 조사보고, 등록, 라벌 붙이기, 사무기록 등이 포함되었다.
매번 출조가 끝난 다음에는 봉인용지를 붙히고 자물쇠를 채워놓았다.
봉인용지에는 4개 부서 공장이 찍혀 있었는데 각각 국무원, 경위사령부, 청실내무부, 사후처리위원회였다.
그때 사업일군이 출조할 때 자신의 영상을 남겨야 했는데 이는 훗날 문서 찾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초조적인 조사결과 청나라 궁정에서 남긴 문물이 총 117만 여점이었다.
고궁 그리고 궁내의 진귀한 보배를 어디로 가져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전 사회의 이슈가 됐다.
사후처리회는 국제관례에서 황실궁전을 처리하는 방법에 따라 대외로 개방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때 일부 유지인사들은 고궁을 박물원으로 개조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은 바로 차이위안페이 베이징대학 교장이다.
1925년 7월 31일, 사후처리회에서 양심전 안방을 조사할 때 중대한 발견을 했다.
바로 푸이와 청궁 유신 진량, 캉유웨이가 복벽을 밀모한 문건이다.
이런 문건의 수색압수는 푸이를 궁에서 쫓아낸 것이 정확한 것임을 일층 인식하게 했다.
푸이가 출궁하여 춘친왕부에서 거주하다가 20여일 뒤 일본공사관으로 숨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톈진 일조계에서 지속적으로 복벽활동을 펼쳤다.
자금성으로 돌아오는 것은 푸이생활의 가장 중요한 꿈으로 되었다.
그때의 긴박한 상황을 고려해 사후처리위원회는 하루빨리 고궁박물원을 설립해야 한다고 여겼다.
정신먀오(郑欣淼) 문화부 부부장 겸 고궁박물원 원장:
1925년 9월 말에 그들은 회의를 한번 소집한 적 있는데 그때 상황이 아주 긴박해 반드시 박물원을 설립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박물원이 설립되면서 푸이 등 자들이 복벽하려는 생각을 철저하게 단절시켜 버렸지요.
1925년 초가을, 고궁박물원 설립일이 공식적으로 확립되기 며칠 전, 리위잉 청실사후처리위원회 위원장 겸 고궁박물원 이사장이 붓으로 ‘고궁박물원’이란 다섯 글자를 썼다.
앞 부분에서 전시한 것처럼 말이다.
1925년 10월 10일,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고궁박물원이 설립되었다.
정신먀오(郑欣淼) 문화부 부부장 겸 고궁박물원 원장:
박물원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와 사회발전을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대외로 개방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기구지요.
인류와 인류환경의 견증물에 대해 연구하고 수집하고 정리하는데 특히 교육, 연구, 관람의 목적에 전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때 한 학자가 이렇게 평가했다.
고궁박물원의 설립은 중국민주혁명의 또 한 차례 승리이자 중국문화사의 성사이며 중국박물관사업이 정규화로 나아가는 시작이기도 하다.
신무문 앞에는 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으며 전에없는 번화한 정경이 나타났다.
위안스카이가 죽은 후의 12년간, 선후로 5명 대통령, 집정자 한 사람, 대원수 한 사람이 번갈아 정권을 잡았다.
누가 정권을 잡든 그들은 눈길을 모두 고궁으로 돌렸다.
1926년, 그때 집정하던 돤치뤠이가 공산학설을 선동한다는 것을 이유로 고궁박물원 이사장 리위잉, 이페이지 등 5명을 지명수배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들이 지명수배된 진정한 원인은 고궁문제에서 돤치뤠이정부와 장기적으로 대립한 것이다.
고궁박물원은 영수를 잃었다.
이때부터 사후처리위원회가 강제 해산되었다.
7개월 후 북양정부의 국무회의가 고궁박물원을 재정비하고 ‘보관위원회’를 내왔다.
새로운 선거에서 만청 유로 자오얼쉰(赵尔巽), 쑨바오치가 정, 부위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들의 선동아래 푸이를 궁으로 맞이하자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졌다.
그때 유임했던 좡윈콴(庄蕴宽), 천위안 등이 강렬하게 반대했다.
그들의 견지로 자오얼쉰, 쑨바오치는 순조롭게 취임하지 못했고 결국 분노하며 사직했다.
고궁박물원은 또 한번 위험한 경지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고궁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우던 천위안이 결국 체포되었다.
천위안은 저명한 교육학자로 그때 푸런대학 교장직을 맡았다.
오늘 그의 제자인 치궁씨가 이렇게 그를 평가했다.
치궁(启功) 93세 저명한 서법가:
그들은 우리는 중국인이고 이런 물건은 중국의 보배라고 생각했던거죠.
1926년, 고궁을 위해 한마음으로 사업하던 우잉선생이 이런 회억을 남겼다.
고궁은 갓 한돌이 된 아기이다.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완전하지 못한데 너도나도 쟁탈하고 재난과 화가 많았다.
우리와 같이 보살피는 고용인은 있는 힘껏 그리고 충성을 다하며 절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북양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기 위해 정부에서 지급하는 돈을 절대 받지 않았으며 모든 지출은 입장료 수입으로 간신히 버텼다.
이와 반대로 건청문 이남의 전조부분은 1914년에 설립된 고물진열소가 북양정부 관리를 받았기 때문에 줄곧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1년도 되지 않는 사이, 고궁박물원의 주요 영도인 리위잉, 이페이지, 천위안이 전부 지명수배 되었다.
새롭게 태어난 고궁박물원을 보위하기 위해 1926년 12월 9일, ‘고궁박물원유지회’가 설립되고 학자, 관리 등 각 분야 인사가 동참하도록 했다.
차이러쑤(蔡乐苏) 칭화대학 사학과 교수:
한 패는 지식분자이고 한 패는 문화명류였어요.
그들의 신분을 보게 되면 문화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잖아요.
문화대사 한 사람이면 백만에 이르는 군사를 인솔하는 군벌도 제압할수 있거든요.
하지만 1년 후, 또 다른 군벌 장쭤린(张作霖)이 고궁을 조사처리하라는 명을 내렸다.
명의상으로는 문물을 철저하게 조사하는 것이었지만 사실상 핑계삼아 유지회를 뒤엎어 권할 대권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아들 장쉐량 장군이 줄곧 고궁박물원을 정성껏 수호했기 때문에 고궁박물원의 업무에는 차질이 없었다.
시간이 1928년까지 흘렀다.
중국은 명의상으로 통일된 민국정부를 맞이했다.
그 해 6월, 지명수배때문에 멀리 타향으로 떠났던 이페이지가 난징국민정부에 의해 고궁박물원 제1임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몸이 허락되지 않아 잠시 북상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마헝 베이징대학 교수 등에 위탁해 고궁을 관리하도록 했다.
마헝이 부임된 후 고궁박물원은 제1기 이사회를 설립했다.
이때부터 고궁박물원은 첫 안정적인 발전기를 맞이했다.
고궁박물원의 앞날이 밝을 조짐이 보일 때 징헝이(经亨颐)란 의원이 놀라운 제안을 내놓았다.
그는 고궁을 청실의 개인의 도산으로 여기며 고궁을 철수할것을 주장했다.
그의 이 제안은 민국의회에서 쉽게 통과되었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년 전 차오쿤이 집정할 때 누군가 외조의 3대전을 밀어버리고 거기에 서양식의 민국의회대청을 건설하자고 건의한 일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그번 일도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결과 멀리 뤄양에 있는 수재군벌 우페이푸(吴佩孚)가 전국에 “만약 이 3대 전을 허물어 버린다면 중국은 영원히 이토록 거대한 고물을 잃어버리게 되고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는 전보를 보내면서 그번 일이 막을 내렸다.
지금 또 고궁을 철수하자는 제안이 나오고 있으니 문화계 인사들은 더욱 분개했다.
그들은 장찌에게 징헝이의 제안에 대해 민국정치회의에서 하나씩 반론할 것을 위탁했다.
고궁박물원은 결국 보존될 수 있었다.
우환(吴欢) 청실사후처리위원회 고문 우잉의 손자:
사실 마음속으로 다른 속셈이 있었어요.
하지만 큰 국면으로 볼 때 고궁에 살 길을 남겨준 셈이죠.
5천년이 되는 중국 문화를 존중한 것이라고 봅니다.
뤄쒜이주(罗随祖) 고궁박물원 부연구관원:
군벌간의 혼전 그리고 동란이 거치면서도 잃어버리지 않고 오히려 완벽하게 보존되어 왔잖아요.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선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야죠.
많은 선인들이 묵묵히 노력했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날 세상에서도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이런 이름을 기억하자.
리위잉, 이페이지, 천위안, 마헝, 좡윈콴, 루쭝린, 우징헝, 선지앤쓰, 우잉, 차이위안페이, 위퉁쿠이 등등.
고궁은 중국문화의 뉴대로서 늘 역사속의 격동, 변화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궁전과 거기에 수장된 진귀한 보배는 운명을 타고 오르내렸기 때문에 늘 그를 아끼고 문화전성이라 여기는 고궁인들을 마음을 조이게 했다.
그토록 동란이 지속되는 세월에도 그들은 고궁박물원을 완벽하게 후세들에게 남겨주기 위해 줄곧 노력했다. 

출처:CC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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