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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다큐]고궁(05) - 나라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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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셀프차이나 작성일14-05-09 21:21 조회5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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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5백여년간 존재한 옛 주택이다. 두 집안이 이곳에서 살았다.
한 집안은 주씨이고 또 한 집안은 성씨가 아이신줴뤄이다.
이 주택에서 벌어진 이야기에 대해 많이 전해지고 있지만 진정으로 알고 있는 자는 극히 적다.
1900년 8월 14일,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공략하자 광서 황제는 자금성에서 도망쳤다.
그가 제일 사랑하던 비자도 이날 죽었다.
진비의 죽음에 대해 궁정의 정부측 기록에 간단하게 몇 마디로 적혀 있다.
자희 태후가 친히 내린 의지에는 ‘지난해 도읍에 정변이 일어났고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진비가 낙오하면서 궁에서 봉변을 당했다. 그녀의 절개가 하도 갸륵하여 은혜를 베풀어 귀비의 칭호를 수여한다’고 적었다.
또 다른 설은 환관 최옥귀와 관련된다. 진비의 죽음에서 최옥귀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8월 14일 오후, 최옥귀가 자희의 명을 받고 몇 년간 줄곧 냉궁에 연금된 진비를 의화헌으로 데려갔다.
자희는 진비에게 “양인이 성에까지 쳐들어온다는구나, 우리는 피하려고 하는데 널 데려가기는 불편하구나”라고 말했다.
진비는 “황태후는 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도읍을 지키고 큰 국면을 유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자희는 큰 소리로 “죽게 된 마당에 어디서 헛튼 소리를 지꺼리는게냐”며 질책했다.
진비는 “전 죽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고 대답했다.
자희는 “넌 죄가 있든 없든 죽어야 한다. 이 년을 우물에 처 넣거라”고 말했다.
궁에 남긴 진비의 발자취를 따라 우리는 황궁 생활의 신비로운 면사포를 천천히 헤쳐보게 된다.
옛 사람들은 천상을 우러러본다.
가장 빛나는 별은 자미성이고 자미성 주변의 성수는 에둘러 자미원을 이루는데 이곳이 바로 전설 속 천제 한 가족의 거처이다.
황제는 천자라 자칭하며 자미원이 인간세상에 비친 그림자가 바로 황제 일가족의 거처인 자금성이다.
이것은 음력 초하룻날 자금성의 성대한 조회장면을 담은 두루마리 그림이다.
청나라의 모든 왕공대신과 세계 각지로부터 온 사절들은 태화전 광장에서 전례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태화전 보좌는 텅 비어있다. 황제가 대체 어디에 있는걸까?
층층의 궁성을 넘어 우리는 전조와 다른 후궁을 보았다.
여기서 황자황손은 궁 밖의 어린이들처럼 폭죽을 터뜨리는 유희에 빠져있다.
여기서 황후 빈비들은 궁 밖의 어머니들처럼 애들을 보살피고 있다.
여기서 황제는 궁 밖의 아버지들처럼 가정의 행복과 단란함을 누리고 있다.
자금성은 건청문을 계선으로 남쪽이 전조이고 북쪽이 후궁이다.
후궁은 건청궁, 곤녕궁, 교태전, 동서 각 육궁으로 구성되었다. 이곳이 바로 황제의 집이다.
황제의 침궁은 건청궁이고 황후의 침궁은 곤녕궁이다.
건청궁과 곤녕궁 사이의 궁전은 교태전이다.
‘건청궁은 하늘이고 곤녕궁은 땅이며 하늘과 땅이 서로 통합하고 음과 양이 화합함’을 뜻한다.
자금성 궁전의 문식도안을 보면 교태전에서 처음으로 봉황이 나타났다.
동서 육궁의 명칭도 대부분 남녀 교합, 자식을 낳아 기르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1888년 겨울, 전국에서 온 스무살 안팎의 여자들이 어화원에 집결되었다.
이들중 누군가는 청나라의 황후로 된다. 이 시각, 그녀들은 ‘수녀’라 불린다.
중국 역대의 후비는 대부분 황족권신 가문의 출신이었다.
그러나 황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정략결혼은 늘 엄청난 정치적 위기도 뒤따랐다.
명나라 때 외척의 권력간섭을 방지하기 위해 주원장은 낡은 풍속을 바꿔 황실 후비는 반드시 민간에서 택해야 한다고 명확히 규정했다.
청나라가 관내로 들어온 후 황제의 후비는 주로 팔기수녀들이었다.
순치 때에는 만족, 몽골족, 한족 팔기 관리의 딸 가운데서 연령이 13 내지 17세 사이면 모두 3년에 한번씩 열리는 수녀 선발에 참가해야 했다.
이중에서 황후, 빈비가 선정될 뿐만 아니라 황자, 황손, 친왕, 군왕 등 황실, 종실을 위해 복진을 물색하기도 했다.
17세를 넘고 또 선정받지 못했을 경우 따로 혼인을 할 수 있다. 엄격한 제도는 황족 혼인의 우선권을 보장했다.
반복적인 선정을 거쳐 다섯 여자애가 운 좋게도 마지막 관까지 왔다.
그녀들은 자희 태후의 남동생 부도통 계상의 딸, 장시 순무 덕형의 두 딸, 예부 좌시랑 장서의 두 딸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 짓는 자가 황제 뒤에 있는 이 여자라는 점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광서가 후궁을 택하는 정경에 대해 그 자리에 있었던 환관 당관경이 상세하게 서술한 바 있다.
‘후궁 선정은 체화전에서 열렸다.
시작되기 전 옥여의 한개, 꽃을 수놓은 염낭 두쌍을 준비했다. 누군가 옥여의를 받으면 황후가 되고 염낭을 받으면 빈비가 된다.
광서가 옥여의를 쥐고 덕형의 장녀 앞으로 다가가 넘겨주려는 찰나 자희 태후가 큰 소리로 '황제'라고 부르며 옥여의를 계상의 딸에게 줄 것을 암시했다.
광서는 그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자희는 광서가 좋아하지 않는 황후를 택하도록 압박했다.
덕형의 딸이 빈비로 될 경우 총애를 쟁탈할 것이 걱정되어 더는 광서가 선택하지 못하게 하고 직접 염낭을 장서의 두 딸에게 넘겨주었다.
광서가 첫 눈에 반한 여성이 낙선되고 자희의 조카 엽혁나랍씨가 광서의 황후로 되었으며 장서의 두 딸이 진비와 근비로 봉해졌다.
그들의 운명이 삽시간에 큰 변화가 생겼다.
자금성에 시집 온 여성은 여러 등급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궁전에 머물게 된다. 명나라 때 12개 등급이 있었다.
청나라 강희 연간, 후비는 8개 등급으로 나뉘었는데 즉 황후에 한명, 황귀비에 한명, 귀비에 2명, 비에 4명, 빈에 6명이었다.
그 아래에 귀인, 상재, 답응 3개 등급이 있으며 인수는 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민간에서 전해지는 3궁 6원 72 빈비이다.
사실상 황제라 할지라도 후비 인수의 차이는 크다.
강희는 한 평생 79명의 후비가 있었지만 광서는 황후 한사람과 비에 2명 총 3명만 있었다.
누가 후궁의 주인인 황후가 될까?
처음 결혼하는 황자 혹은 어린 황제 대신 앞날을 계획하고 멀리 내다보는 아버지, 어머니나 황태후가 결정권을 갖고 있다.
결국 선정된 자는 가장 매력있는 여성인 것이 아니라 황실에서 권력을 통합적으로 고려한 후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자이다.
1889년 정월 스무이렛날 자시, 융유 황후의 봉수레가 자기 집 관저에서 출발해 자금성으로 향했다.
광서 황제의 대혼이 시작되었다.
침방은 곤녕궁에 배치되었다. 명나라 황후의 침궁이 청나라가 관내에 진입한 후로 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명절 조하를 받는 곳으로 되었다.
궁정에서 대혼을 치를 때 동난각이 바로 신혼 제후의 침방이고 그들은 여기서 함께 3일을 보내야 한다.
이날은 광서에게 있어 한 여자의 남편으로 되는 것외에도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으로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희 태후가 광서 황제의 대혼의식이 끝나면 수렴청정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외계에 방금 선포했기 때문이다.
이 날을 황서는 15년이나 기다렸다.
1874년 12월 5일 밤, 4살된 재첨이 자금성으로 보내졌다.
몇 시간 전, 19세 동치 황제가 병으로 죽었다.
동치에게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재첨은 당제의 신분으로 황궁의 주인이 되었다.
이 아이는 꿈 속에서 따뜻한 가족의 품을 떠나 광서 황제로 되었으며 34년에 달하는 슬픈 인생을 시작했다.
고궁 동부의 육경궁은 청나라 황태자가 궁에서의 거처였다.
광서가 5살이 되니 어떻게 황제가 되어야 할지를 배워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어린 천자의 교실이 바로 육경궁에 있었다.
청나라 황자들은 어렸을 적에야 동서 육궁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10살이 되면 후궁에서 나와 육경궁이나 더 먼 남삼소에 거주해야 한다.
친왕으로 봉해진 후에야 자금성에서 나와 아버지가 증정한 왕부에서 거주한다.
황자들에게 있어 궁정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아마도 글을 배우는 생활일 것이다.
매일 날이 채 밝기도 전에 황자들은 서방으로 들어가 스승을 따라 시문을 짓고 유가경전을 배워야 한다.
만족 스승이 만족어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을 가르치는데 해질녘이 되어서야 수업을 마쳤다.
청나라 황자의 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자금성 전 세대 주인인 명나라 황실의 교훈을 받아들인 듯 하다.
명나라 황태자들에게도 출가 강학 제도를 실행했지만 엄격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청나라 12명 황제가 천부적인 재능이나 기회가 서로 달랐지만 대다수는 성실하게 정무를 보았는데 이는 엄격한 황자 교육제도의 공헌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책 읽는 소리와 함께 광서는 하루하루 성장했다.
자금성에서 이 작은 정원은 눈에 띄지 않지만 중축선 외에 가장 환영받는 풍경구이다.
옹정 이후부터 역대 청나라 황제들의 침실은 약간은 비좁은 정원에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는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중국 황제의 침궁인데 광서 황제가 거주했을 때의 원 모습을 거의 보류했다.
많은 사람들은 비좁은 침궁에 놀라기도 한다.
자금성의 건설자는 이곳을 그저 잠시 휴식하는 곳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황제 침궁으로 된 후 자신의 침실과 천자의 위의함과 어울리게 하기 위해 방안의 배치를 아주 사치스럽게 했다.
동치 2년의 ‘양심전 침궁 배치문서’에는 그때 이곳의 장식품만 724건에 달한다고 기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양심전 침궁 동서 양켠에 각각 한 세트의 침대가 있다.
동쪽의 침대는 황후가 왔을 때 사용하고 서쪽 침대는 비자가 사용하도록 준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황제의 자객을 방지하기 위해 취침할 때 두 침대의 커튼을 동시에 내려놓기에 누구도 그가 어느 침대에서 자는지 알 수 없다고 전해진다.
자금성 사람은 아침 일찍 일어나는데 습관되었다.
자희 태후가 기상하는 정경에 대해 종일 옆에서 시중드는 궁녀 하영아가 상세하게 서술한 적 있다.
‘태후 방에 불이 켜지면 잠자리 시중을 드는 궁녀가 바닥에 엎드려 “태후마다 잘 주무셨습니까?”고 문안한다.
태후의 이불을 개고 나서 은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아온다.
태후는 따뜻한 손수건으로 손을 감싸고 따뜻한 물에 꽤 오랜 시간 담그고 있는다.
그러는 동안 2~3번 물을 바꾸는데 손등과 손가락 관절이 느슨해질 때까지 담근다.
그리고 나서 세수하는데 세수라기 보다는 온찜질을 한다고 말하는게 더 낫겠다.
이러면 얼굴의 주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야 화장대 앞에 앉는다.
환관을 불러 머리를 빗고 눈썹을 그리고 귀밑머리를 다듬고 분과 연지를 바른다.
다음 살담배 두 대를 피우고 나면 밀크티가 올라온다.
태후는 젖과 우유를 잘 마신다.
태후는 멋 부리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멋 부리는 것을 가르치기도 한다.
태후는 늘 “한 여자가 자신을 단장할 생각조차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고 말한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난 자희는 보좌에 앉는다.
이 시각 광서 황제와 후비들은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
매일 아침 황제는 후비와 함께 태후에게 문안을 올리러 가는데 이는 자금성에서 수 백년간 변치 않는 규정이다.
결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안을 올리러 간 광서는 자희와 특별한 대화를 나누었다.
자희 태후는 웃으며 “황제는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황제는 “양심전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양심전에서 오느라면 종사문을 지났느냐?” “네”
“종사문의 내력을 아느냐?”
“그건 스승에게서 들은 적은 있습니다. 아들이 무능하여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어바마마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왜 종사문이라 했느냐면? 큰 수컷 메뚜기 이름이 종사였는데 움직이기만 하면 날개에 소리가 났단다.
그러면 많은 암컷 메뚜기가 찾아왔었지. 그리고 메뚜기마다 99명의 새끼를 낳았단다. 선황이 우리 가족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겠느냐.”
다 말하고 난 태후는 광서와 융유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얼굴에는 이미 웃음이 가셔진 뒤였다.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궁정에서 누구나 다 아는 ‘비밀’이다.
자희가 택한 황후를 광서는 거의 가까이 한 적이 없다.
자희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이 둘을 이어놓았지만 결국에는 한쌍의 낯선 부부로 되고 말았다.
자금성의 높은 성벽은 12채의 궁궐을 외계와 갈라놓았다.
이들의 위치는 동서로 대칭되고 외관상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마치 두 겨드랑이처럼 중축선의 후삼궁에 의지하고 있다.
여기에는 황제의 여자들이 살고 있는데 황제의 온갖 총애를 받는 자가 있는가하면 날마다 독수공방하며 외롭게 일생을 보내는 자도 있다.
그녀들의 운명은 후궁의 유일한 남자가 자신에 대한 총애 여부에 달려있다.
황제가 빈비를 어떻게 소견하는지 대해 민간에는 줄곧 환관이 비자를 등에 지고 온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비자를 이불에 감싼 다음 환관이 등에 지고 황제의 침궁에까지 간다는 것이다.
진실한 모습을 어땠을까?
매일 오후 황제가 저녁 식사를 할 때면 모든 빈비는 양심전 뒷마당에 있는 연희당에서 조용히 기다린다.
후궁, 빈비를 온종일 괴롭히던 고민거리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난 뒤면 곧 해결된다.
빈비의 이름이 새겨진 녹색 쪽지가 황제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황제가 어느 여성과 오늘 밤을 보낼지를 결정한다.
청나라 황제 가운데서 광서의 빈비가 제일 적었는데 황후에 한명, 빈비에 2명이었다.
후궁의 일인자로 불리우는 황후는 녹색 쪽지 후보에 속하지 않았다.
융유 황후는 늘 양심전 광서 침궁 동쪽의 휴순당에서 살았다.
하지만 서로 마음이 없는 이 한쌍의 부부는 진정으로 함께 생활한 적이 거의 없었다.
후궁간의 다툼에서 진비가 쉽게 우위를 점했다.
아무리 총애를 받는 빈비일지라도 온 밤 황제의 시중을 들 수 없다는 궁내의 규정이 있다.
하지만 소견이 끝난 뒤에도 빈비들은 자신들의 침궁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는 없고 양심전 황제 침실의 옆방에서 휴식하면 된다.
양심전 옆에 위치한 연희당 서주방은 사실상 이미 진비의 두번째 침궁으로 되었다.
세심한 광서는 이 방에 장막 하나, 커튼 하나, 큰 이불 한 세트를 더 가져다 놓도록 명했다. 그들의 사랑에 있어 이는 잠깐이면 흘러지나가는 황금시기이다.
진비는 귀엽고 영리했다.
두 손으로 글을 쓰고 그림 그리기와 노래하기를 좋아하는가 하면 호위관포를 입고 광서 앞에서 꽃미남으로 분방하며 황제를 기쁘게 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촬영기술을 궁으로 들여 왔으며 늘 광서를 졸라 환관에게 사진을 찍게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진비가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자 자희 태후가 크게 노했다.
그는 생활이 사치하다는 것을 이유로 진비에게 벌을 내렸다.
하지만 그때 진비가 행동거지가 바르지 않은 증거로 되었던 촬영이 몇 년이 지난 뒤 자희 태후가 가장 애지둥지하는 것으로 되었다.
매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난 뒤는 황제의 휴식 오락시간이다. 궁내의 휴식 생활은 풍부하고 다채롭다.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고, 글을 쓰고, 그림 그리며 애완견을 기르고 연극을 감상하며 운동을 하는 것 등이다.
궁정회화 가운데서 명선종은 현재의 골프와 비슷한 운동인 추환을 놀고 있다.
일반인들처럼 황제들도 여러가지 휴식오락을 즐기고 애호가 있다.
하지만 일반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흥취 애호 일지라도 궁에서는 나라의 앞날에 위협주는 엄중한 후과를 초래할 수 있다.
명무종 정덕 황제는 무술을 아주 좋아했기에 스스로를 대장군이라 책봉했다.
그리고 장사에도 흥미가 아주 높았기에 늘 상인처럼 단장하고 자금성에 상점과 술집을 차리곤 했다.
명세종 가정 황제는 궁에서 장생불로의 방법을 연구했다.
궁녀에게 매일 아침 어화원의 아침 이슬을 모아 단약을 만드는데 공급하도록 명했다.
명신종 만력 황제는 수십년간 대신을 만나지 않고 늘 궁에서만 지냈는데 가장 큰 애호가 돈을 모으는 것이었다.
남방의 풍요로운 땅에서 받아온 염세는 대부분 황궁의 지하에 숨겨놓았다.
명희종 천계 황제는 뛰어난 기술을 장악한 목수였다.
그가 물을 뿜으며 구슬을 노는 금룡을 설계했지만 조정은 대환관인 위충현에게 맡긴 것으로 전해졌다.
그들은 애호가 있음으로 하여 생활이 풍부하고 다채로와졌지만 반면 명나라의 멸망도 가속 됐다.
자금성의 새 주인은 백산흑수에서 왔고 표한한 민족성격을 갖고 있었기에 청나라 황실의 레저생활도 무술숭상 정신이 강했다.
목란사냥처에서 청나라 중전기 약 두 세기사이 황제가 만족, 몽골족 귀족 장병 1만여명을 이끌고 100여차나 포위사냥을 했다.
이는 평화 연대에 필요한 군사연습일 뿐만 아니라 만족, 몽골족 귀족 간의 감정을 교류하는 가장 적합한 외교행사였다.
겨울의 자금성에서 만족특색이 짙은 오락이 시작 되었다.
스케이팅은 청나라 황실에서 겨울에 가장 즐기는 오락활동이다. 공연에 참가하는 팔기 장병은 약 1200명이다.
그들은 얼음 위에 구불구불한 용모형을 이루어 머물러 있다가 고속으로 미끌어 내려가는 과정에 여러가지 우아한 동작을 해야 함과 아울러 기문에 걸린 작은 공을 정확하게 맞쳐 황제를 기쁘게 해야 한다.
황제가 혼사를 치른 그날부터 자금성의 모든 사람들은 새 생명이 태어나기를 학수고대 한다.
후비들이 임신하는 것을 ‘기쁨을 맞이한다(遇喜)’고 말한다.
‘궁정 현행 정례 제정’에서 이에 대한 전문적인 규정이 있다.
빈비들이 임신하면 매일 먹는 것을 절반 더 주고 아이를 낳은 자는 내정에서 보살필 수 있도록 허락한다.
황후가 아이를 낳고 만 한달이 되면 은 천냥, 옷감 삼백필을 하사한다.
빈비가 아이를 낳았을 때에도 상응한 대우를 받게 된다.
중국 고대에서 황위를 계승하는데는 기본적으로 아래와 같은 원칙을 지킨다.
황후가 낳은 장자가 첫 계승자가 되지만 황후에게 아들이 없을 경우 일반 빈비가 낳은 아들을 장자로 정한다.
그 어느 후궁에게도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황족 가운데서 양자를 들여 황제로 정하거나 황제의 동생이 황위를 이어받는다.
청나라 옹정이 비밀리에 황태자 간택제도를 실시하면서부터 계승자의 능력을 더욱 중시했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변하지 않는다.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황위 계승자는 반드시 황제의 아들이어야 한다.
황자, 오직 황자, 훗날의 황제를 낳기 위해 후궁들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지만 속에는 질투, 증오, 살의로 가득차 있다.
1475년, 29살난 명헌종이 일어나 거울을 보다가 머리에 몇 가닥의 흰 머리가 자란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렇게 늙은데 아들이 없구나” 하고 탄식했다.
이때 황제의 머리를 빗어주던 환관 장민이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5년이나 숨겼던 비밀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워낙 헌종이 자기보다 17살이나 연상인 만귀비만 총애했다.
하지만 만귀비가 후궁을 좌우지하기 위해 임신한 모든 빈비들에게 강박적으로 낙태약을 먹였다.
만귀비의 아들이 일찍 죽은 뒤로 줄곧 임신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명헌종은 거의 대가 끊이게 되었다.
5년 전 초가을의 하루, 헌종이 궁에서 독서하고 있을 때 당직을 맡은 여관 기씨를 만났다.
기씨는 광시 요족 토관의 딸로 단정하고도 영리했다.
황제가 묻는 말에 대답하면서 행동거지가 하도 참해 헌종의 마음을 단번에 움직였다.
황제와의 우연한 이번 만남으로 기씨는 임신하게 됐다.
이 모든 것이 자연히 궁궐 곳곳에 심어놓은 만귀비의 눈과 귀를 피할 수는 없었다.
만귀비는 궁녀더러 기씨에게 낙태약을 전달하라 명령했다.
하늘의 뜻이었는지 기씨가 강박적으로 낙태약을 마셨지만 아이가 떨어지지 않았다.
일찍부터 만귀비의 만행에 불만을 품었던 장민 등이 만귀비에게 기씨가 중병에 걸렸다고 거짓 보고했던 것이다.
명나라 황궁의 규정에 따라 기씨는 베이하이 부근의 안락당에 보내져 자생자멸 해야 했다.
그래서 궁내 수많은 사람들의 보호아래 기씨는 궁 밖에 숨게 되었으며 아이를 낳아 몰래 키웠던 것이다.
진실을 알게 된 헌종은 즉시 사람을 파견해 아들을 맞아들였다.
한달 후 기씨가 죽고 환관 장민도 갑자기 죽었다. 사람들은 만귀비가 한 짓이라고 말했다.
잔혹한 후궁다툼에서 운좋게 살아남은 이 아이가 13년 뒤 황제의 보좌에 올라앉았다.
‘다자다복’은 중국 민간의 전통 관념이다.
곤녕궁 침방의 신혼 침대 위에 깔린 백자이불은 이러한 전통관념이 황궁에서의 체현이다.
백자에 관한 전고는 처음 ‘시경’에서 나오는데 주문왕의 자손이 많은 것을 칭송하기 위한 것이었다.
화면은 늘 해음해의를 사용하여 황제가 다복다수, 다자다손, 자손이 번창하고 영원히 이어져 나가기를 바랐다.
태조 누르하치부터 아이신줴뤄 일가에 이르기까지 줄곧 가문이 번창했다.
하지만 함풍 황제가 내유외환을 안고 황위에 오른 후부터 황실의 혈맥이 갑자기 약해졌다.
함풍 6년 3월, 난귀인이 여기서 함풍 황제의 아들 재순을 낳았다.
함풍의 장자가 어렸을 때 죽었기 때문에 재순이 황위의 유일한 계승자로 되었다.
이 때문에 궁에서의 지위가 그리 높지 않았던 난귀인이 결국 자희 태후가 되었으며 반세기동안이나 중국의 진정한 최고 통치자로 되었다.
자희 태후의 유일한 아들인 동치 황제가 스무살도 되기 전에 병으로 죽었다.
동치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동치 당제의 신분으로 황위를 계승한 광서도 아직 아이를 낳지 않았다.
자손이 없는 것은 황실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타격이자 한 왕조가 곧 파멸된다는 불길한 징조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국은 현재 가장 애달픈 연대로 들어서고 있었다.
젊은 광서 황제는 크나큰 변혁을 통해 이 나라를 변화시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것은 우리가 미국 국가도서관에서 찾은 고궁의 가장 이른 영상인데 1903년 한 미국인이 촬영한 것이다.
중국인이 5백여년간이나 우러러보았던 고궁이 그 해에는 이미 내려다 보고 들여다 보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번 영상촬영을 하기 4년 전의 1898년, 황제가 주도한 신유정변이 103날이 되던 날 자희 태후가 비밀리에 갑자기 의화원에서 자금성으로 돌아왔다.
광서가 연금되고 자희 태후가 수렴청정을 다시 시작했다.
1908년 10월 21일, 진비가 조난당한 7년 뒤 허약해진 광서도 세상을 떠났다.
하루 뒤, 강한한 자희 태후도 세상을 떠났다.
자금성은 마치 큰 무대와도 같다. 그저 무대 위와 아래에 한 갈래의 두꺼운 막이 쳐 있었으며 한번도 열지 않았을 뿐이다.
1908년의 늦가을, 또 한 아이가 자금성에 보내졌다. 훗날, 사람들은 그를 말대 황제라 불렀다.
몇 년후, 이곳은 더는 황제의 집이 아니었다. 

출처:CC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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