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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다큐]고궁(04) - 강산을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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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셀프차이나 작성일14-05-09 21:19 조회4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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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에는 1만여개의 문이 있다.
매일 아침, 그중의 일부 문이 열리고 수많은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진다.
하지만 전에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은 모두 명성이 혁혁한 왕공귀족들이었다.
1861년 음력 11월 초하루, 이날의 상조 의식은 전과 달랐다.
자금성 역사에서도 처음으로 있은 일인데 이번 의식을 ‘수렴청정’이라 부른다.
양심전은 자금성 중부에서 서쪽으로 전혀 눈에 띄지 않는 궁전이자 자금성에서 가장 신비한 궁전이기도 하다.
옹정 이후부터 이곳은 중국 정치 결책 중심으로 되었다.
수렴청정을 하기 전 날, 혜친왕 면유는 조서 한 부를 받았다.
그가 ‘수렴청정’의식에서 예의를 면할 수 있다는 특별한 허가였다.
면유가 황친귀족 가운데서 촌수가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렴’이라는 상조의식이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선조의 제도와는 대체 어떻게 다를지 그에게도 신선하게만 느껴졌다.
명나라 때부터, 황제가 평소 대신을 소견하고 국사를 처리하는 방식에 큰 차이가 없었으며 ‘어문청정’ 혹은 ‘어전청정’이라 불렀다.
즉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상조이다.
건청문 광장은 자금성을 ‘외조’와 ‘내정’으로 갈라 놓았다.
외조는 또 전라라 부르고 내정은 후궁이라 부르기도 한다.
명나라의 일상 정무는 모두 전조에서 처리했지만 청나라 때 정무중심은 후궁으로 옮겨갔다.
명나라 때 조정으로 나가려면 대신들은 남성, 동성으로부터 출발해 오문에 도착한 뒤 금수교를 거쳐야 황극문 즉 오늘의 태화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황제의 노선은 거주지 건청궁으로부터 황극전 혹은 황극문에 도착하는 것인데 총 길이는 약 5백 여미터이다.
청나라 때 대신들은 동화문을 통해 자금성으로 들어간 후 경운문을 지나 건청문에 도착했다.
하지만 황제가 건청궁에서 건청문까지 가는 거리는 50미터 밖에 안 된다.
명청 두 조대를 비교할 때 청나라 황제가 명나라 황제가 걷는 길이 훨씬 짧았다.
청정의식이 전조로부터 후궁으로 옮겨갔는데 이는 명청 5백년간 중국 정치제도의 변화를 의미한다.
‘대명회전’의 기록에 따르면 아침에 상조할 경우 대신들은 반드시 오야에 일어나 절반 경성을 지나서 오문으로 가야 한다.
새벽 3시, 대신들은 오문 밖에 도착해 기다려야 한다.
오문 성루의 북이 울려 퍼질 때 대신들은 가지런히 줄을 지어야 한다.
종소리가 울리면서 궁문이 열린다.
백관이 순서대로 들어가고 금수교를 지나 광장에서 대오를 정렬한다.
관리 가운데 기침을 하거나 가래를 뱉거나 걸음걸이가 신중하지 않은 자는 감찰을 책임진 어사에게 기록되었다가 처분을 기다려야 한다.
통상적으로 황제가 태화문 혹은 태화전에 도착하면 백관은 무릎을 꿇고 삼괘구고두의 예를 올려야 한다.
4품 이상의 관리만이 황제와 대화할 수 기회가 있으며 대신이 황제에게 정무를 보고하고 황제는 문제를 제기하거나 회답한다.
1498년 늦가을의 하루, 궁에 불이 일어나자 그날 밤을 뜬 눈으로 새운 홍치 황제는 하루 상조를 면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때 홍치 황제가 조정에 나가지 않으려면 대신에게 청가를 맡아야 했다.
하지만 10여년이 지난 후인 정덕 황제 때는 한마디 말도 없이 대신들이 온 종일 헛 되이 기대리게 하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오늘 상조를 취소한다’고 통지했다.
배고픔에 시달리던 대신들은 서로 급히 집으로 돌아가려 했으니 오문 내는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고 한 장군이 금문에 압사 당해 죽는 일까지 벌어졌다.
황제가 조정을 소홀이 하는 일이 명나라 때 절대 개별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명나라 만력 연간, 대신들은 20여년이나 조당에서 황제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명나라 때, 황제가 조정으로 나가 정무를 처리하지 않는다고 해도 국가는 대신들과 일련의 정무 순서에 따라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청나라 때는 명나라 때와 확연히 달랐다.
이때 대신들은 그저 명에 따라 일을 처리하면 된다.
어떤 일이라도 황제가 친히 나서 지휘했기 때문에 성실하게 정무를 보는 것이 대다수 청나라 황제의 특점이기도 하다.
건청문 광장 양켠의 공예품상점을 전에는 구경방이라 불렀는데 청나라 대신들이 상조를 기다리는 곳이다.
1861년 음력 11월 초하루, 면유와 대신들은 바로 여기서 ‘수렴청정’을 기다렸다.
역사적으로 황권이 위협을 받을 때 일부 비상수단을 동원하는 것이 필연적인 일로 돼 버렸다.
‘수렴청정’은 특수한 수단으로 황권을 수호하려는 특례일 따름이다.
명나라 때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의 5백년간, 자금성은 세계적으로 유일 무이한 궁전으로 건설 되었으며 중국 봉건 집권도 흥망성쇠를 거쳐 점차 멸망으로 향하고 있었다.
중국 역사에서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재상이란 단어는 명나라 이전에 생겨난 것이다.
그때 재상은 문무백관의 총두목 이었는데 지어 황제의 조서에 재상의 사인이 없으면 효력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재상이 있으면서부터 상권과 군권은 줄곧 충돌이 있었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립한 뒤 재상을 폐지했으며 일련의 새로운 정치권력 체제 구축에 나섰다.
1402년, 갓 조카 손에서 황위를 빼앗은 명성조는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두 가지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하나는 도읍을 자신의 세력 범위인 베이징으로 옮겨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각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이러면 하나의 국사 자문기구가 정식 건립된 셈이다.
전에 재상은 결책권, 의정권과 행정권을 갖고 있었다.
명성조가 내각을 구성한 후부터는 재상이 갖고 있던 결책권을 자신이 꼭 틀어쥐었으며 의정권은 내각에, 행정권은 6부에 나눠 주었다.
지방은 삼사로 나누어 각각 사법, 군사, 행정을 나누어 관리하고 직접적으로 6부의 관리를 받는다.
명성조가 권력을 틀어쥐고 있음으로 하여 내각과 6부, 각 사에서는 맡은바 직책을 수행했다.
나라의 최고 행정명령이 자금성으로부터 내려져 전국 1936곳의 역참, 총 길이가 14만 3천 7백킬로미터인 역도를 거쳐 층층이 제국의 방방곡곡에 하달됐다.
훗날, 명선종 시기에는 더욱 완벽한 정무 과정을 이루었다.
전국의 크고 작은 주소, 백성들이 황제에게 올리는 건의는 모두 통정사사가 한데 모은 다음 사예감이 황제가 심의하도록 올려 보내는데 나중에 내각에 가져간다.
내각은 처리의견을 작성하고 사예감이 의견을 황제에게 올려 허락을 기다린다. 나중에 육과에서 교정을 본 뒤 하달한다.
내각 대신의 건의는 종이장에 써서 조서 위에 붙여놓는데 이를 ‘표의(票拟)’라고 한다.
황제가 붉은 글씨로 결재한다 하여 ‘비홍(批红)’이라 부른다.
규정에 따라 황제는 몇 권만 결재하고 대다수의 ‘비홍’은 사예감의 환관이 황제의 뜻에 따라 대필했다.
예전 같으면 환관이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명선종은 이런 규정을 바꿨을 뿐만 아니라 그의 격려 아래 궁에 전문적인 환관 학당을 세웠다.
후인들은 명선종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환관으로 내각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상한 정치국면이 나타났다.
우리는 명나라 내정, 외정의 기구가 완전히 대칭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외에는 내각, 내에는 사예감, 외에는 삼법사, 내에는 동장, 금의위가 있고 내정에서는 지방에 총독, 순무를 파견했는가 하면 외정에서는 진수 환관, 수비 환관 등등을 파견했다.
이렇게 내정과 외정이 서로 제약해야만이 황제의 결책 지위를 보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로 내외 양대 정치 세력이 권력과 이익을 쟁탈하는 국면도 초래 되었다.
자금성 동부의 건축물을 명나라 때에는 문연각이라 불렀다. 명나라의 내각은 바로 여기에 설립되어 있다.
명나라 만력 연간, 내각 보좌관 장거중으로 하여 자금성에서 가장 평범하던 집이 명성이 혁혁한 곳으로 되었다.
문연각에서 정무를 처리하는 내각은 사실상 정무의 결책자나 다름 없었다.
겉보기에 관례에 따른 정무과정에 변화가 없는 듯 하지만 결책권은 이미 이전 되었다. 장거중이 어떻게 한 것일까?
우선 그때 만력 황제는 아직 어린애였다.
장거중은 황제의 스승으로 황제의 결책에 쉽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게다가 만력의 ‘비홍’은 사예감 풍보의 지도 아래 완성되었는데 풍보가 장거중과의 관계가 아주 밀접했다.
장거중은 남에게 의중을 전달하고 전소를 쓰게 한 다음 자신의 ‘표의’를 이용해 찬성했다.
어린 황제의 비홍에는 자연히 문제가 있을리 없었다.
이렇게 되어 대신의 전소, 여러 대신의 표의, 황제의 비홍을 모두 장거중이 장악하고 있었으니 전에없이 일치했던 것이다.
그의 새로운 정치는 추호의 걸림돌도 없이 순리좁게 추진 되었다.
사예감이 ‘비홍’권을 틀어쥐면서부터 환관이 섭정하는데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그후로 환관과 내각 간의 권력과 이익쟁탈이 끊기지 않았으며 결국 1506년에 절정에 이르렀다.
그 해 늦가을의 하루, 사예감의 환관이 평소와는 다르게 건청궁과 내각 사이를 분주히 오갔다.
환관 유근의 권세가 갈 수록 커지자 내각에서는 유근을 탄핵하기로 결정 했지만 정덕 황제는 명확한 태도를 밝히지 않았다.
내각 대신은 이튿날 상조했을 때 마지막 승부를 겨루기로 작심했다.
유근을 몰아내지 못하면 내각 전 성원이 사퇴할 예정이었다.
이튿날, 태화문 밖에서 조회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정덕 황제가 오지 않았지만 유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의 유근은 마피를 관리하는 두목일 뿐만 아니라 이미 황제에 의해 사예감 총관으로 임명되었다.
황제가 결국 내각과 얼굴을 붉혔다.
사실 환관의 후견세력은 황제였다.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받고 있는 환관을 탄핵한다는 것은 황권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에 황제가 가만 있을리 없었다.
이날부터 전국의 모든 중요한 공문은 먼저 유근에게 가져 갔다가 그가 본 다음에야 육부와 내각에게 전달되었다.
그렇다면 유근이 어떻게 황제의 ‘비홍’관을 넘겼을까?
정덕 황제는 노는 것을 즐겼으며 날마다 말을 타고 독수리를 노는가 하면 후궁에서 재래 시장을 열고 친히 상인 역할을 하며 즐기기도 했다.
유근은 번마다 황제가 한창 놀음에 빠져있는 틈을 타 공무를 보고했다.
번마다 황제는 귀찮다는 듯 “이런 일도 날 성가스럽게 하는거냐?”고 말했다 한다.
그래서 유근은 당당하게 황제의 비홍을 대체하게 됐다.
우리는 명나라의 대신들이 오문을 지날 때 두려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유근이 권력을 장악한 뒤로 여기서 선후로 23명의 대신을 형장으로 문책했다.
‘형장 문책’은 ‘힘껏 때리는 것’과 ‘단단히 때리는 것’으로 나뉜다.
‘힘껏 때리는’데 걸린 자는 자칫 잘못하면 불구자로 되었으며 ‘단단히 때리는’데 걸린자는 목숨을 건지는 경우가 없었다.
경중정도는 감형관의 발끝을 보면 알 수 있다.
발끝을 벌이면 사람이 죽을 때까지 때리지 않는다.
하지만 발끝을 한데 모은다면 반드시 죽을 때까지 때린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환관은 명나라 정치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천기 연간에 이르러서는 환관의 전권행위가 절정에 이르렀는데 궁정에 있는 환관이 10만명에 이르렀다.
그때 천기 황제가 늘 잠을 설쳤다.
가까운 곳에서 사는 환관 총관 위충현이 아침 일찍 일어나는데다 세수할 때 양푼을 소리나게 마구 두드렸는데 황제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그때 위충현은 사람들로부터 1천세로 불렸으며 후에는 9천세로 불리다가 나중에는 9천 9백세로 불렸다.
명나라 초부터 명나라의 정무중심은 자금성의 이 몇개 곳에서 오갔다.
권력의 교체가 명나라의 운명을 좌우지했다.
궁궐 가운데서 권력을 쟁탈하는 음모가 늘 일어났다.
몇대 황제의 노력을 거쳐 명나라 때 일련의 완벽한 정무체계를 구축했다.
권력 평형에서는 완벽함을 자랑했다.
후에 서양인들이 따라배웠으며 훗날의 내각제와 총리제를 구축했다.
중국 명나라 성화 연간에 내각 보좌관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총리의 초기 형태이다.
하지만 이 제도는 명나라 말기에 이미 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완벽한 제도의 보장이 없었던 왕조는 마치 곧 무너질 청사와 같았기 때문에 절대 혼자의 힘으로는 다시 돌이킬 수 없었다.
숭정 2년, 황태극이 10만명에 이르는 기병을 이끌고 원숭환이 지키고 있는 산하이관을 에돌아 준화를 공략하고 베이징을 습격했다.
원숭환이 베이징에 급보를 보냄과 아울러 신속한 방어에 나섰다.
하지만 숭정제는 그가 황태극과 도읍을 함께 도모할 것이라 추측했다.
청나라에서 군대를 철퇴하자 원숭환은 비명에 죽었다.
그후부터 명나라의 옹근 부대가 청나라 군에 투항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랴오둥 명나라 군은 모두 “도사에 대한 충심으로 스스로 도망칠 수 없으니 우리 같은 자들이 왜 이곳에 있는가?”고 한결 같이 말했다.
이자성이 베이징성을 돌파하기 전 날, 숭정은 건청궁에서 종을 치며 대신을 집결하려 했지만 그 누구도 불러오지 못한 것으로 서사에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 2백여년간의 역사도 이 시각 이미 끝까지 다달았다.
숭정 황제가 경산에서 눈부시게 휘황한 자금성을 보고난 뒤 농민 봉기군이 성을 공략하는 함성소리와 함께 자신의 생명을 마감했다.
이자성이 명나라를 뒤엎은지 한달이 조금 넘자 청군이 베이징으로 쳐들어 왔으며 자금성의 주인도 바뀌었다.
하지만 이 황궁처럼 황권은 중국의 마지막 봉건왕조에서 여전히 이어져 나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갈 수록 더 두드러지고 있다.
1772년 초겨울의 하루, 옹정 황제가 강희가 결재했던 어지는 모두 위에 바쳐야 하며 사사로이 남기는 자가 있을 경우 엄히 처벌할 것이라는 어지를 내렸다.
옹정 황제가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급히 강희가 결재했던 어지를 거두어들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후인들은 그해 황제가 결재했던 어지 가운데 강희가 황위 계승자에 대한 의견이 씌여져 있어 옹정의 통치에 불리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이 시각부터 옹정의 집권이 서막을 열었다.
3년 뒤 한 프랑스 전교사가 ‘그는 신체가 웅장하고 말 주변도 있었지만 말하는 속도가 아주 빨랐다. 총명해 보였을 뿐만 아니라 활력도 넘치는 사람인 것 같다.’며 옹정 황제에 대한 첫 인상을 얘기했다.
외국 전교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황제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이제 막 올라 앉은 황위가 불안정한 것이었다.
사실 이런 고민거리는 그의 몇 몇 선배들도 겪었다.
청나라 초기, 누르하치가 의정왕 대신회의를 소집했다.
국가 대사는 회의에서 토론하고 결정했으며 황제를 파면할 권리도 있었다.
누르하치의 이 규정은 훗날의 황위 계승자들에게 많은 고민을 가져다 주었다.
순치는 다이곤의 전권을 고민했고 강희는 제멋대로 날뛰는 오배에 골머리를 앓았다.
황제를 불안하게 한 자들은 거의 모두 의정왕 대신회의의 골간이었다.
양심전의 서난각은 옹정이 정무를 처리하고 조서를 심열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그가 친히 쓴 ‘황제로서 스스로 직접 나서 천하를 다스려야지 천하의 사람들의 봉양만을 받아서는 안 되느리라’는 대련이 걸려 있다.
글자 안팎으로 옹정 황제가 집권에 대한 갈망을 드러냈다.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순치는 명나라의 내각을 회복하고 강희는 남서방을 내왔는데 모두 의정왕 대신회의의 권력을 분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옹정은 의정왕 대신회의가 여전히 자신의 황위를 크게 위협하고 있다는걸 잘 알고 있었다.
옹정 8년, 그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다.
옹정 황제가 몽골 갈이단과 싸우는 것을 빌미로 내세웠다.
군사정보를 정리하는 내각이 내정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비밀을 누설하는 경우가 비교적 많았다.
이로부터 그는 군기처를 내왔다.
건청문 광장 서북에 있는 한 줄로 된 주택이 바로 군기처의 직방이다.
우리는 군기처의 주택과 궁성 사이에 2미터의 간격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전에 이곳에 양심으로 통하는 한 갈래의 전문적인 통로가 있었는데 이 길은 궁성을 가로질러 있었으며 어선방을 지나면 직접 양심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그 길을 다시 찾아볼 수 없지만 어선방 정원의 궁성에는 여전히 통로와 비슷한 흔적이 남아있다.
어느 길로 가던지 군기처에서 양심전까지 50미터 밖에 안 돼 황제가 수시로 군기대신을 소견하고 국가대사를 알 수 있었다.
황제는 중앙, 지방 관리가 올린 상주문을 열독하고 군기대신은 황제가 조서를 구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군기처로 돌아온 뒤 조서를 작성한 다음 다시 양심전에 가서 황제의 결정에 맡긴다.
이 모든 걸 완성하는데 한 시간이면 족하다.
상소문이 황제의 허락을 받고 나면 공식적인 조서로 되며 군기처에서 하달한다.
군기처는 공문의 긴박 정도에 따라 전달 속도를 결정한다.
‘인츰 전달하라’고 적힌 것은 하루에 삼백리를 가야 하고 더욱 긴박한 것은 4백, 5백, 6백리라고 적혀 있다.
역참에서 마필만 바꿔가지고 그대로 급히 전달해 지방 관리에게 넘겨야 한다.
이러면 황제가 군기처를 통해 직접 각급 관리에게 명을 하달할 수 있다.
군기처가 점차 새 정무의 뉴대로 된 후로부터 누르하치 시기부터의 의정처는 점차 유명무실해졌다.
똑같이 행정 중추였지만 명나라의 내각은 황제의 침궁과 1천미터나 떨어져 있었고 청나라 군기처가 황제 침궁과의 거리는 50미터에 불과했다.
정무중심이 점차 황제 침궁으로 옮겨가는 과정은 권력이 황제에게 집중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군기처를 내온 옹정은 황제 혼자의 힘으로 천하를 다스리려는 이상을 결국 실현했다.
하지만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을 때 총명함과 유능함을 겸비하지 못한 황제는 늘 감당하기 어려웠다.
1840년 7월 4일, 저장 딩하이 부근의 해면에 갑자기 영국 군함이 들이닥쳤다.
딩하이 지현이 군함에 올라 그들이 온 목적을 물었다.
영국인이 그더러 다음날 투항하라 했으며 아니면 성을 향해 포를 쏠 것이라 말했다.
이때의 베이징 자금성은 예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튿날, 도광 황제는 예전처럼 황태후에게 문안을 올리고 몇 가지 일상적인 공문을 처리했다.
하지만 이때 베이징과 수천리 떨어진 딩하이는 이미 영국인 손에 넘어갔다.
딩하이에서 베이징까지 조서를 전달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20일이 걸려야 했다.
도광 황제는 7월 24일에야 딩하이가 함락된 소식을 접했다.
이 20일 사이에 현지 관리는 황제의 명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정세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으며 이로 군사 방침이 지장을 받게 되었다.
그후부터 도광 황제는 각지로부터 온 전보를 육속 받았는데 정보가 아주 혼잡했다.
8월 9일 , 전쟁이 시작된지 한달여만에 도광 황제는 영국이 이미 전쟁을 도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이때 영국 군함이 이미 톈진까지 압박했다.
집권제 아래 전쟁의 결책자는 황제지만 도광 황제는 군사 상황을 제때에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게 없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도광 황제는 아직도 “영국이 중국과 7만리나 떨어졌다고 들었네,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 전쟁을 역사에서는 ‘제1차 아편전쟁’이라고 부른다.
고궁 군기처 전람실에는 상소문 상자가 진열되어 있다.
옹정 황제가 점차 완벽화시킨 밀절제도에서 이같은 상소문 상자가 널리 사용되었다.
명나라 때 대신들이 황제에게 올리는 조서는 각급 아문을 거쳐 층층이 보고되었기 때문에 어떤 때는 황제가 상소문을 보기도 전에 일부 대신들은 이미 상소문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옹정시기부터 이같은 상소문 상자를 사용했다.
여기에는 궁정에서 특별히 제작한 구리 자물쇠가 잠겨 있었으며 황제와 상주하는 대신에게만 열쇠가 있었다.
대신이 상주하는 상소문은 황제 외에는 그 누구도 아는 자가 없었다.
이른바 ‘짐의 눈과 귀로 되어 천하의 모든 일을 여럿이 함께 알자’는 것이다.
옹정 황제는 밀절제도를 빌어 자신의 관리범위를 각지의 방방곡곡에까지 넓혔다.
지어 동일한 곳에서 집정하는 관리도 서로 경계하고 의심했다.
이같은 밀절 정치의는 황제가 백성들을 세심하게 보살피기 위한 것이었지만 뜬 구름을 잡는 사람들에게 편리를 도모해주는 꼴이 되기도 했다.
밀절제도를 내올 때 옹정 황제는 “밀절에서 신중이란 두 단어가 가장 중요하다면서 군주가 신중하지 않으면 대신을 잃게 되고 대신이 신중하지 않으면 몸을 바르게 할 수 없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고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이 말은 1백여년이 지난 후 검증되었다.
제2차 아편전쟁기간, 영프 연합군이 광저우성을 돌파한 뒤 총독부에서 일부 상소문 상자를 노획했다.
거기에는 청나라 양광 총독 기영이 도광 황제게 쓴 밀절도 있었다.
밀절에서 서양인을 모욕하는 언어를 본 영국인은 마음 속 깊이 원한을 품었다.
그후 담판과정에 기영이 영국인들에게 대놓고 모욕을 받자 중도에 자리를 떠났다.
결과 실직죄로 황제로부터 자살하라는 명을 받았다.
완벽한 상소문 비밀제도를 내왔던 옹정 황제가 1백여년 후 최고 기밀이었던 상소문이 마치 폐지마냥 침략자에 의해 노획되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도광 황제는 전에 ‘정치를 위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길’을 ‘큰 주택’에 비유하면서 ‘그 주택에서 사는 사람들이 수시로 보수한다면 자연히 완벽할 것이지만 만약 파괴되는 대로 놔두면 필연코 크게 손을 대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자금성이라는 이 큰 주택은 명성조 때부터 건설되었다.
그간 봉건왕조의 정치제도가 여러번 바뀌고 보충되었지만 결국 황제와 황권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역사로 되어버렸다.
1861년 음력 11월 초하룻날, 이번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예전의 청정과는 달리 이번에 조당에는 앞뒤로 2개의 보좌가 놓였고 가운데 커튼으로 막아놓았다.
면유와 수많은 대신들은 앞좌에 앉은 어린 황제를 알현했지만 지의는 커튼 뒤에서 그들에게 전달됐다.
자희가 대권을 틀어쥔 후 앞좌에 앉은 황제는 마치 괴뢰와도 같았다.
그녀는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강권 황제의 역할을 소화했다. 이로부터 청나라의 집권정치가 새로운 절정에 이르렀다.
1912년 2월 12일, 중국 봉건황제의 마지막 한차례 정무가 양심전에서 시작되었다.
이제는 상조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이번 의식의 유일한 내용이 융유 황태후가 6살난 푸이를 데리고 황제 퇴위조서를 발표하는 것이었다.
‘아문청정’이나 ‘수렴청정’은 이때 이미 선조의 제도로 되었고 중국의 봉건왕조도 영원히 역사로 돼 버렸다.

출처:CC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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