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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다큐]고궁(03) - 예의 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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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셀프차이나 작성일14-05-09 21:16 조회4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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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으로 들어가는 4개 대문 가운데서 동화문이 가장 독특하다.
아주 세심한 사람만이 동화문에 못이 8줄로 되어 있으며 9줄로 된 다른 3개의 대문과는 차별화 되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미세한 차이점으로 4백여년 전 조정에 큰 풍파를 불러왔다.
1521년 3월 , 명무종이 죽었다. 무종에게는 아들도 형제도 없었다.
그래서 황태후의 뜻에 따라 후베이의 주후총이 번왕의 신분으로 황위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주후총은 베이징 선무문에까지 도착해서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황제라는 보위 앞에서 주후총은 대체 뭘 망설였을까?
발단은 예부에서 정한 황위 계승 예의에 있었다.
주후총은 동화문으로부터 자금성으로 들어간 후 먼저 문화전에 도착해 황태자의 신분을 얻은 다음에야 황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문정이 한 줄 적은 동화문은 오문, 신무문뿐 아니라 서화문 보다도 등급이 낮았다.
자금성의 설계에서 이 대문은 태자의 궁전구역인 문화전과 인접되어 있으며 태자가 자금성을 출입하는 통로이다.
황제는 거의 동화문을 다니지 않는다.
고집불통인 주후총은 예부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 계승자는 “나는 황위를 계승하는 것일뿐 황자는 아니다. 난 황제가 되러 온 것이니 어찌 황태자의 신분으로 입궁하겠느냐?”는 입장을 주장했다.
쌍방이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자 결국 황태후가 황위를 오래 비우지 못하기 때문에 백관은 그 날부터 성 밖으로 나가 들어올 것을 권고하라며 타협했다.
4월 28일 정오, 주후총이 소원대로 대명문 정중 어로를 통해 궁으로 들어가 황위를 이어 받았으며 연호는 가정이다.
조정의 예의 전쟁으로 시끄러웠던 사건이 잠시 일단락되었다.
이번 겨룸에서 대신들은 곧 황위에 오를 황제에게 감히 맞섰다.
더욱이 주후총은 황위를 잃은 위험까지 감내하며 자기 의견을 고집했다. 설마 그저 예의 절차 때문이었을까?
예의 뒤에는 대체 어떤 비밀이 숨어있을까?
1661년, 정월 초이렛날, 24살의 순치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
임종할 즈음, 황위를 8살난 아들 현엽에게 물려준다는 구두 유조를 남겼다.
이틀 뒤, 정월 초아흐렛날 현엽이 황위에 올랐다.
등극대전은 자금성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이다.
5백 여년간 20여차 밖에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한 정경은 직접 겪은 자여야만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의 무한한 상상을 가장 많이 자극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번 행사는 청나라 군이 관내로 들어온 후 자금성에서 여는 두번째 등극대전이다.
그 해 순치가 황위에 오를 때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이자성이 패하여 도망친데다 자금성의 여러 곳이 파손되었던 시기여서 모든 걸 간소화했다.
전통에 따라 대전을 태화전에서 진행한 것이 아니라 태화문으로 옮겨갔다.
10여년 간의 전쟁, 경영을 거쳐 현엽이 황위에 오를 때는 나라가 기본적으로 안정되었기 때문에 규칙제도에 따라 완벽한 대전을 열 수 있었다.
대전을 어떻게 진행해야 될지? 대전의 순서, 황제의 행차 행렬, 입석 등을 어떻게 배치해야 될지?
이런 것들은 청나라 초기 예의 관리 앞에 놓인 과제였다.
사실 대전의 모든 세부사항에 대해 역대의 궁정 문서에는 모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정권이 교체되어도 복장 이외의 주요한 행사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청나라 예의 관리에게 명나라가 남긴 규칙제조 문헌인 ‘명회전’은 아주 좋은 모델이었다.
현재 우리가 청나라 등극대전을 재현하려 할 때에도 ‘청회전’은 중요한 단서로 되고 있다.
등극대전에 앞서 황제는 친히 가거나 혹은 관리를 파견하여 먼저 천단, 지단, 태묘, 사직단에서 천지, 선조 등에게 알린다.
행사가 열리는 날, 황실 호위병은 자금성 각 요도의 대문을 엄히 지킨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왕공대신들은 조복을 차려입고 순서대로 자금성에 들어간다.
태화문 밖에는 황제의 손수레가 진열되어 있고 태화문 지붕 아래에는 단폐음악 악대가 대기하고 있다.
태화전 지붕 아래에는 중화소악 악대가 나란히 서있다.
태화전 광장 동서 양쪽에 정기와 갓 등 의장대가 준비하고 있다.
태화전의 모든 문이 열렸다.
대학사와 예부 관리가 태화전으로 들어가 황제가 곧 황위에 오르는 조서, 축사를 적은 표문, 붓과 먹, 종이, 벼루 등을 서로 다른 탁자 위에 놓는다.
대학사는 건청문에서 황제 옥쇄를 꺼내서는 태화전 황제 보위의 정남방향 탁자 위에 올려 놓는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때 8살 난 현엽이 흰색 효복을 입고 건청문에 놓은 아버지 순치의 위패 앞에서 삼괘구고두의 큰 절을 올리고는 곧 황위에 오른다는 소식을 직접 말씀드렸다.
이어 건청궁 바로 옆 궁궐에서 황제의 예복을 바꿔 입고 옷차림을 단정히 한 후 황태후의 궁전으로 향해 삼괘구고두의 예를 올린다.
이때 건충궁 중문에 커튼을 치는데 이는 선황제의 장례를 잠시 중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날이 점차 밝아오자 황제는 건청문 왼쪽으로부터 문을 나서 중화전으로 향했다.
중화전 보좌에 앉자 곧 열릴 행사에서 지휘를 맡은 각급 관리들이 미리 황제에게 삼괘구고두의 큰 절을 올렸다.
곧 이어질 행사에서 이들은 절을 면할 수 있기 때문에 업무에 몰두할 수 있다.
현엽이 결국 태화전의 보좌에 올라 앉았다. 그후로 그는 이 자리를 61년이나 지켰다.
자금성에서 가장 중요한 대전을 현재 그대로 다시 재현할 수 없을 뿐더러 궁정 회화에서도 등극대전의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전문가의 지도아래 고궁박물원에 수장된 궁정과 관련된 기타 대전의 회화 작품에서 소재를 얻고 기술수단을 운용함과 아울러 정경재현과 애니메이션 합성방법을 통해 강희 등극대전의 성황을 만들어냈다.
선황제 장례의 우울함에 휩싸였던 등극대전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중화소악과 단폐대악은 진열만 해 놓았을 뿐 연주는 하지 않았다.
악기가 울려 퍼질 때 자금성에서도 중요한 행사가 열리게 된다.
자금성에는 해마다 3차례의 중요한 전례가 열린다.
음력 정월 초하루를 옛날에는 원단이라 불렀다.
새해가 시작되는 첫날이라 왕공대신, 외국사절은 황제에게 진상하고 축사를 올려야 했다.
예의순서는 등극대전과 흡사하지만 경사롭고 편안한 분위기가 짙다.
황제의 생일을 전에는 만수절이라 불렀으며 전국적인 명절이다.
이날 경성의 장인들은 채색화, 포필 등으로 주요한 거리를 화사하고도 아름답게 꾸미는 외에도 여기저기서 노래와 춤판이 벌어진다.
각지의 문무백관은 향안을 설치하고 경성 방향을 향해 큰 절을 올린다.
동지날은 자금성의 또 다른 큰 명절이다.
이날 북반구의 태양 각도가 가장 낮기 때문에 태양이 가장 오래 태화전을 직사하는 날이다.
2004년의 동지날, 우리는 특수한 촬영법을 이용해 1년 가운데서 가장 보기 힘든 태화전의 풍경을 기록했다.
동지날, 햇빛은 대전 정중앙의 편액에까지 직사할 수 있다.
옛 사람들은 동지날을 음양이 전환되는 날이기 때문에 이 날이 지난 후에는 음기가 점차 수그러들도 양기가 점차 왕성해진다고 생각했다.
동지날, 황제는 천단에서 하늘을 향해 제사를 올리고 이튿날에는 태화전에서 문무백관의 조하를 받는다.
중국의 예의제도는 주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주례•대종백지직’에서는 예의를 길례, 가례, 흉례, 군례, 빈례 5대 유형으로 총괄했다.
‘큰 예를 3백번 올리고 작은 예를 3천번 올린다’고도 말한다. 군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예는 모든 곳에 있고 시시각각 표현된다.
최고 예의행사를 치르는 곳으로서 자금성 건축물 곳곳에서 예의를 규범화하려는 역할을 드러내고 있다.
그때 처음 자금성에서 열리는 대전에 참석할 외국사절들이 넓고도 긴 천안문광장을 지나 깊고 으늑한 천안문 문동을 거쳐 지나갔다.
오문광장의 양켠에 있는 조방으로 하여 자금성의 통로는 더욱 길고 좁아보였다.
오문의 옆문으로 입궁하니 눈앞이 확 트이는 것만 같았다.
태화문 한쪽을 지나서 그는 갑자기 아주 넓은 광장을 발견했다.
광장의 끝은 지위가 높고 금빛이 번쩍이는 태화전이였다.
이 시각 외국 사절은 마음 속으로부터 경외심이 생겼을 것이다.
중축선 어도를 따라 오문을 들어서는 것은 황제 그리고 그와 혼사를 치르는 황후의 특권이다.
하지만 몇 년마다 한번씩 특례는 있었다.
1년의 시작은 봄에 있다.
양춘 3월, 1년 가운데서 희망을 키우는 계절이다.
일부 중국인들에 있어 일생의 희망도 바로 이 시각부터 꿈꾸게 되는 것이다.
층층의 선발을 거쳐 일부 지식인들이 곧 자금성에 입성하게 된다.
3년에 한번씩 진행되는 전시는 고대 중국 과거고시의 마지막 고비이다.
사실상 자금성에서 전시에 참가할 자격있는 수험생은 이미 앞서 진행된 시험을 통과하고 공사 칭호를 수여받았다.
황궁에서 진행되는 고시를 통해 수험생들은 천자의 문생으로 되는 무한한 영광을 느낀다고 한다.
이것은 청나라 건륭 연간의 전시 답안지이다.
수험생은 정연한 해서로 황제가 친히 낸 문제를 해답해 태양이 서산으로 넘어가기 전에 시험지를 바쳐야 했다.
시험지의 첫 머리에는 수험생의 연령, 출생지, 본인, 아버지, 할아버지의 이름, 신분을 쓰고 과거고시에 참가하는 경력도 써야 한다.
그다음 엄밀히 봉인하여 보관한다. 우선 답안지를 읽는 대신이 최고로 잘 된 것을 10편 골라내서 셋째날 여명에 황제가 친히 심열할 수 있도록 올려보내며 황제가 최종 서열을 결정한다.
1790년 이전 명, 청 두 조대의 전시는 모두 태화전 광장 노천에서 진행되었다.
건륭 연간에는 보화전에서 열렸는데 이로 황제가 수험생에 대한 관심을 표현했다.
전시가 열린 후의 다섯번째 날은 성적을 발표하는 날로 전려라 부른다.
중국 제1 역사문서관에서 우리는 1904년 중국의 마지막 한 차례 전시 금방을 찾았다.
그해 총 273명이 고시에 참석했는데 그중에는 담연개, 심균유 등과 같은 유명한 역사인물들도 있었으며 말대의 장원은 유춘린이었다.
전려는 자금성에서 열리는 중요한 전례이다.
강희 6년의 장원이었던 목동은 일기에서 그 날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그 날 날씨가 좀 추웠다. 오경 즈음, 나와 여러 진사들은 태화전 앞에서 전려를 기다렸다.
전날 이미 누구는 장원이고 누구는 방안이며 누구는 탐화인지를 전해 들었다.
난 이미 희망은 없고 그저 의식에 참석할 따름이다. 전려가 시작되자 위에서 제1갑을 불렀다. 생각 밖에 일등이 나였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음악이 울려퍼졌는데 난 혹여나 잘못 들었나 하여 대열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결국에는 예부의 관리가 나를 이끌어 냈다.
그래서 나와 방안, 탐화 3명은 예부의 관리를 따라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오문 중문을 통해 궁에서 나왔다.’
이날, 3명의 행운아는 황제와 황후만이 걸을 수 있는 오문 중문을 통해 궁에서 나왔다. 천하 지식인의 꿈 속에서 가장 긴 길일 것이다.
수험생들이 자금성에서 고통에 모대끼고 영광을 누리고 있을 때 중국 농민들도 1년 가운데서 가장 바쁜 계절을 맞이했다.
이것은 농민이 서로 다른 계절에 신근하게 노동하는 장면을 담은 비단 그림이다.
중년 남성의 형상이 매 한 폭의 그림에 나타난다.
겉보기에는 일반 농민처럼 보인다. 사실 그의 이름은 윤진으로 강희 황제의 넷째 아들이다.
그의 아내와 아들딸의 모습도 ‘경작도’에서 볼 수 있다.
강희가 농업 생산을 중시한다는 것은 이미 천하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니 이 화책은 자연히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었다.
속셈이 많았던 윤진은 치열한 황위 계승전쟁에서 마지막까지 웃을 수 있었으며 연호는 옹정으로 정했다.
그가 농업에 대한 관심은 아버지 강희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옹정 황제의 일상생활을 기록한 기거주에서 우리는 황제인 그도 해마다 하루는 농민으로 일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금은 옹정 6년 2월 중순이다. 전국 농민은 곧 파종시기를 맞이한다.
성남의 선농단에 호호탕탕한 대오가 도착했다.
선농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은 중국 역대 제왕의 관례이다.
청나라는 선농단의 동남쪽에 1700무의 농토를 개간했다.
제사를 마친 후 친히 파종에 나서는데 이로 천하의 농민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준다.
경작할 때 황제는 한 손에 쟁기를, 한 손에는 채찍을 들고 있다.
예의 규정에 따라 황제는 세번을 끌어야 한다.
하지만 옹정 황제는 마음껏 즐기기 못했는지 한 번 더 끌었다.
농업국가의 흥망성쇠는 늘 하늘의 은혜에 의거했다.
황제는 스스로 천자라 자랑하며 인간세상에서 하늘의 은택을 가장 많이 받은 자로 생각한다.
하지만 일단 하늘이 노해 풍파를 일으킬 경우 맨 먼저 벌을 받아야 하는 자도 황제뿐이었다.
하늘과 대화하는 것은 황제가 거절할 수 없는 신성한 책임이다.
하지만 황제와 하늘이 대화하는 방식은 바로 다양한 제사행사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황제는 제사를 아주 중시했으며 착용 복장과 같은 세밀한 부분에서도 아주 엄격한 규정을 내왔다.
궁정 제사에는 총 80여가지 종류가 있는데 대사, 중사, 군사 3개 등급으로 나뉜다.
대사는 황제가 친히 제사를 올리는 것이고 중사는 황제가 조금 제사를 올리고 대부분은 관리가 제사를 올리는 것이다. 군사는 전부 관리가 대행한다.
대다수 제사는 모두 수 천년간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조상들이 대대로 관외에서 살았던 만족이 자금성의 새 주인이 되면서부터 새로운 제사행사가 황궁에 나타났다.
곤녕궁 제신은 청나라 자금성에서 가장 많이 올리는 제사였다.
명나라 황후의 침궁이 자금성의 새 주인에 의해 여러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장소로 바뀌었다.
곤녕궁에 오늘까지도 관제의 화상이 보존되어 있는데 매일 아침마다 제사를 올려야 했다.
청나라 사람들은 관제를 숭배했으며 팔기 장병은 그를 보호신으로 추앙하면서 전쟁에 나갈 때마다 먼저 제사를 올리곤 했는데 관제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곤녕궁 저녁의 제사는 일반적으로 오후 4시 전후에 시작되는데 만족, 몽골족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원시종교 색채가 짙었다.
청나라 황실 선조로부터 전해려 내려온 샤머니즘 제신의식이었다.
곤녕궁 동북 모퉁이에 작은 방 한 칸이 있다.
청나라 때 문 앞에 찰떡을 만드는 도구가 있었다. 방 안에는 부뚜막이 있고 그 위에는 3개의 큰 가마가 걸려 있다.
신에게 제사를 올릴 때마다 신위 앞에서 돼지를 잡은 뒤 이곳에서 맑은 물로 삶아 다시 신에게 바쳤다.
황제가 친히 곤녕궁 제신을 치르고는 왕공대신을 이끌고 신에게 올린 고기를 맛본다.
신육(神肉)에는 어떠한 조미료도 넣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고기를 먹어야 하는 왕공대신들에게는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여서 어떤 사람들은 몰래 소매에 소금을 조금 감췄다가 찍어먹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역대의 황제들은 모두 제사를 중시했다.
하느님, 선조와 만물에 공경함을 표하고는 것외에도 더 중요하게는 강산이 영원하기를 경건하게 기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도라도 오랜 세월동안 한 왕조의 안정과 태평을 보우할 수는 없다.
명나라가 자연재해와 전란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백산흑수에 새로운 힘이 육성되고 있었다.
누르하치와 그의 팔기 장병들이 결국 명왕조를 뒤엎었다.
누르하치의 손자가 자금성의 보위에 올랐을 때 성숙되고 강대한 문명이 앞에 놓여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금성의 새 주인은 이미 전통문명에 완전히 융합되었으며 수 천년간 전해져 내려온 예의법도가 청왕조 통치의 기초역할을 했다.
나라를 운영하는데 지남역할을 하는 여러가지 규칙제도는 청나라에서도 명나라 때처럼 완벽하고 복잡했다.
자금성에서 진행된 여러가지 전례, 의식이 청나라에서는 전에없이 정엄하고 성대했다.
1793년, 자금성의 주인은 70세를 넘은 건륭 황제였다.
성세의 통치가 이미 58번째 해에 접어들었다.
건륭은 스스로에 아주 만족하면서 ‘10가지가 완벽한 노인’이라 자칭했다.
주변의 사람들은 황제의 83번째 생일을 위한 준비에 한창이다.
만수절은 청나라 3대 명절 가운데의 하나이다.
온 나라가 경축할 뿐만 아니라 아시아, 유럽의 일부 나라에서도 축하하러 오곤 했다.
왕년과 달리 이 해의 생일축전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온다.
수 천년을 거쳐 완벽함을 자랑하던 예의제도가 전에 없는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1793년 여름, 영국 어선단이 중국 저우산군도의 딩하이 항구에 도착했다.
영국 조지 3세의 특사 마거얼니가 방대한 사절단을 이끌고 건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중국으로 왔다.
영국 사절단 성원은 각각 일기에 중국에 대한 첫 인상을 적었다.
수행 화가 알렉산더의 작품을 통해 오늘날 사람들도 1793년의 중국을 볼 수 있다.
이곳의 집은 높아서 두 층이다.
지붕의 곡선이 우아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야수와 도덕을 방지하는 그 어떤 시설도 없다.
이 나라는 아주 안전한가 보다.
곳곳에서 사람들은 팽이돌아가듯 바삐 돌아친다.
중국에는 한가하게 노는 사람도 거지도 없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난뱅이들이 어깨로 차로도 싣을 수 없는 물건을 나른다.
중국인은 어려서부터 남과 사이좋게 지내고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교육을 받는다.
노인은 가정의 젊은이들과 함께 지내며 가정마다 가보를 보류하고 있다.
본보기를 보였던 선조의 사적을 인용하여 해마다 적어도 한번은 가족과 함께 선조의 묘를 청소하고 제사를 올린다.
가족 성원은 자주 왕래하고 삼촌은 조카에게 “가족이니깐 체면차릴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중국인 생활에 자주 등장하는 한가지 동작에 영국인은 의구심을 품었다.
영국 사절단 정사 마거얼니는 이렇게 적었다.
‘중국 항법사와 그의 몇몇 동포들이 배에 올라 우리를 도와주었다. 그들은 배 위의 모든 설비를 신기하게 구경했다.
그들이 면회실에서 자기네 황제의 초상을 본 순간 즉시 무릎을 꿇고 아주 공경하게 여러번 절을 올렸다.
이 화상은 20여년 전 한 상인이 영국으로 가져온 것이다. 참 재미있는 일이다.
전에 중국에 왔던 의사가 대사는 반드시 중국 황제에 삼괘구고두의 절을 올려야 한다고 알려준 적이 있었다.
영국의 영예를 위해 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에게만 두 무릎을 꿇는 영국인들은 자연히 고두가 중국 예의에서의 의미를 알리 없었다.
영국 사절단이 황제에게 무릎을 꿇려 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자금성에까지 전해졌다.
기분이 언짢아진 건륭 황제는 대신에게 빠른 시일내에 영국인에게 고두 예의를 가르칠 것을 명령했다.
고두,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외국 사절들이 반드시 받아야 하는 필수과목이다.
아쉽게도 이번에 온 영국 사절단은 천조에 순종하는 학생이 아니라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자신들이 세계패주라 확신하는 영국이었다.
마거얼니는 당시 영국에서 가장 선진적인 과학기술 상품을 가져왔다.
이런 것은 그의 자본이었으며 중국인들의 눈길을 끌어 상품을 대량 구입하게 할 생각이었다.
예의에서의 논쟁은 그저 사소한 일일 뿐이다.
하지만 그는 잘못 생각했다.
건륭의 결론은 ‘그들은 무지하며 예의를 모른다. 이토록 무지한 외적들에게는 예의를 갖출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영국에서 공물로 보내온 여러가지 선물은 성심을 생각해 받으라는 어지를 내렸다.
사실 천조에는 여러가지 귀중한 물건이 아주 많았기 때문에 그쪽 나라에서 보내온 물품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시장을 개척하라는 사명을 짊어지고 온 마거얼니는 결국 실패로 귀국했다.
그는 “나의 모든 시간은 예의에 빼앗겼다. 이번 행의 목표는 지어 제기할 기회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그들이 가져 온 선물은 황실 원림에 방치되었으며 수십년 뒤 영-프연합군이 원명원을 점령했을 때에야 비로소 이런 선물을 발견했다.
그중에는 대포와 총에 넣은 탄약이 그대로 있었다.
중국인은 이런 것들에게 전혀 흥취를 느끼지 못했으니 자연히 다칠리도 없었다.
예의 논쟁이 있은 3년 후의 1796년 2월 초, 중국의 음력 그믐날, 건륭 황제는 또 한번 영국 국왕 조지 3세로부터 양국 무역 확대를 희망하는 편지를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건륭 황제는 거절했다.
이는 건륭이 황제의 신분으로 내린 마지막 조서이다.
내일이면 그는 60년 전 보위에 오를 때의 약속을 지켜 황제의 보위를 아들에게 넘겨주는 게 된다.
1735년 9월 3일, 옹정 황제가 죽은지 열흘이 되는 날 건륭이 황위를 계승했다.
그날 건륭은 선조의 영전에서 맹세했다.
‘선조 가운데서 강희가 나라를 61년이나 통치했습니다. 만약 하느님이 도와주신다면 나에게 같은 기회를 주십시오. 선조를 뛰어넘지는 못하겠습니다. 집정 만 60년이 되는 해에 황위를 아들에게 넘기겠습니다.’
60년이 지났다. 그해의 기도가 이제는 현실로 되었다.
수수대전의 전날 밤,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에 쌓여있던 건륭이 시 한 수를 읊었다.
‘오늘은 건륭의 저녁이라 내일이면 가경의 해로 되리라.
고금을 보아도 이루기 어렵거늘 하늘이 혜택을 베풀어서라네.
부모에게 감사를 드리고 마음 속으로부터 더욱 경건해리라.
근성 있는 노인은 다행이도 60에 다 완성할 수 있다 말하네'
1796년 곧 황위에서 물러나게 될 건륭 황제가 자만할만도 했다.
한편으로 농업 생산을 나라의 국책으로 이끌어 나감으로써 3분의 1의 인구가 자급자족을 실현했다.
또 한편으로 예의화된 생활 덕분에 황족으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본분을 지키고 분수에 넘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이같은 시대가 바로 오랜 세월동안 중국인들이 꿈꿔왔던 성세가 아닌가?
천하에 이보다 더 안정되고 더 합리한 나라가 있을까? 세계적으로 논해도 짐과 대응하게 힘을 겨룰 자가 있는가?
1796년 초, 음력 원단, 건륭이 가경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수수대전이 자금성에서 열렸다.
건륭은 천고에 전에없는 성사라고 말했다.
자금성의 주인이 장엄한 시각을 누리고 있을 때 3년 전 유럽으로 돌아간 마거얼니가 직접적인 체험으로 서방나라가 중화제국에 대해 몇 세기동안이나 완벽하다고 상상했던 것을 타파했다.
“중화제국은 그저 한 척의 보잘 것 없이 낡아빠진 선박일 뿐이다.
다행히도 몇몇 세심한 선장이 있음으로 하여 선박이 150년간 침몰되지 않았다.
거대한 몸체로 주변의 이웃 나라들이 두려워하고 있다.
만약 무능한 자가 배의 키를 잡는다면 배 위의 규율과 안전은 지키지 못하게 된다.
즉시 침몰되지 않을지라도 잔해마냥 여기저기 떠돌다가 해안으로 올라오면 산산조각날 것이다.”
지구 한편의 사람들은 천년을 거쳐 예의 천하의 신화를 창조했다.
그러나 지구 또 한편에서는 이 신화가 이미 수시로 깨뜨릴 수 있는 물거품으로 돼 버렸다.
자금성에서 열린 성대한 의식이 곧 결속된다.

출처:CC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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